"이대남은 파시스트다."
"20대 여성은 다 페미니스트다."
두 문장 모두 틀렸다. 그리고 두 문장이 만들어내는 피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나는 이 글에서 이대남 담론 자체를 비판할 것이다. 동시에 그 담론에 반응해서 20대 여성을 뭉뚱그려 페미니스트로 몰아가는 방식도 똑같이 비판할 것이다. 어느 쪽도 편들 생각이 없다. 양쪽 모두 논리적으로 엉성하고 정치적으로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이대남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불붙은 건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다. 20대 남성의 72.5%가 오세훈을 찍었다는 출구 조사가 나오면서, 언론과 정치권은 앞다퉈 "20대 남성이 우경화됐다"라는 서사를 쏟아냈다. 그 뒤로 이대남은 선거 때마다 소환되는 고정 키워드가 되었고, 2025년 대선에서 범보수 후보 득표율이 74.1%에 달하면서 담론은 더 과열됐다.
여기까지만 보면 통계적 근거가 있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실제로 20대 남성의 투표 패턴은 다른 집단과 다르게 움직이는 경향이 있고, 이를 분석 단위로 삼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선거 데이터를 잘 들여다보면 이 집단이 '보수화'되었다는 말 자체가 정확하지 않다. 2020년 총선에서 이들은 민주당 계열에 47.7%를 줬다. 2024년 총선에서도 보수 우위는 근소했다. 같은 집단이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을 58.7% 지지했으면서 탄핵에도 51%가 찬성했다. 이게 무슨 이념적 일관성이 있는 보수화인가. 이건 이념이 아니라 정서적 반발의 진동이다. 그때그때 싫은 쪽을 찍는 유동적 비토 집단에 가깝다.
동아시아연구원 구본상 교수는 22대 총선 분석에서 20대 남녀의 이념과 정책 태도 차이가 실제 투표에 미친 영향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수준"이라고 밝혔다. 투표를 가른 건 이념이 아니라 특정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였다는 것이다. 즉 이대남은 확고한 이념 블록이 아니라, 그때그때 반응하는 감정적 유권자 집단에 훨씬 가깝다.
게다가 한국 여성학 저널에 게재된 잠재 계층 분석 연구는 19~34세 남성 3,435명을 분석해서 이들을 적어도 4개 이상의 서로 다른 젠더 인식 유형으로 분류했다. 강경 반페미니즘 성향은 약 25.9%였다. 4명 중 1명이다. 나머지 4분의 3은 어디로 갔나.
이 지점이 이대남 담론의 핵심적 실패다. 약 260만 명에 달하는 20대 남성을 에펨코리아나 디시인사이드에서 가장 크게 소리치는 25%의 목소리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건 대표가 아니라 왜곡이다.
2024년 말 12·3 사태 이후 이대남 극우화 담론은 절정에 달했다. 서울서부지방법원 점거 폭동 참여자 중 20~30대 남성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는 사실이 "이대남 집단 전체가 파시즘적"이라는 결론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멈춰야 한다.
폭동에 참여한 수백 명이 20대 남성이었다는 사실이 260만 이대남 전체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가? 2025년 3월 한국갤럽 조사에서 18~29세 남성의 탄핵 찬성률은 52%였다. 74%가 범보수 후보를 찍은 집단에서 탄핵 찬성이 과반이라는 이 역설은 바로 이 집단이 단순히 "극우"라는 라벨로 묶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극우화"라고 부르려면 먼저 극우를 정의해야 한다. 연세대학교 복지국가 연구센터가 극우 기준을 수립하고 조사한 결과가 제시(자국민 우선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타자화(이민자·난민 혐오)를 바탕으로 공적 복지 혜택을 제한하려는 성향으로 정의)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언론 보도는 그 기준 없이 행동 극단 측과 여론 전체를 뭉개버린다. 몇백 명이 법원을 점거했다는 사실로 수백만 명의 이념을 규정하는 건 논리가 아니라 선동이다.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더 신중하게 써야 한다. 파시즘은 국가주의, 엘리트 중심의 권위주의적 일당 지배, 폭력의 정치적 수단화, 민주주의 절차의 부정을 핵심으로 한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페미니즘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이 파시즘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 단어를 너무 쉽게 쓰면 실제 파시즘적 위협이 등장했을 때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게 된다.
물론 이 집단 안에 권위주의적이고 민주주의 가치와 충돌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25% 내외의 강경층에 대한 정확한 비판으로 제기되어야 하고, 나머지 75%를 적으로 돌리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대남 전체를 파시스트로 규정하는 주장은 정확하지도 않고, 전략적으로도 최악이다. 오히려 중도적 20대 남성들을 진짜 극우 쪽으로 더 밀어 넣는 효과를 낸다.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여성시대 회원이 84만 명이다. 20대 여성 8명 중 1명은 여시를 한다." 이 주장은 남초 커뮤니티에서 수십만 번 공유됐다. 그런데 이 숫자는 결정적으로 잘못됐다.
84만은 누적 가입 수다. 준회원 포함이다. 준회원은 글 제목조차 볼 수 없는 수준의 계정이다. 실제 활동 회원은 약 20만 정도. 이를 20대 여성 321만으로 나누면 6.2%다. 여기에 연령대가 20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 가입 목적이 뷰티·생활정보가 다수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여시 = 이대녀의 표준"이라는 등식은 산산이 무너진다.
메갈리아는 전성기 구독자가 약 2만 1천 명이었다. 워마드는 약 3만 명. 둘을 합쳐도 20대 여성 320만 명의 1.6%다. 그 1.6%의 가장 극단적인 게시물이 캡처되고 증폭되어 "이것이 20대 여성의 본심"이 되었다.
n번방 26만이라는 수치도 해체해야 한다. 이 숫자는 텔레그램 성 착취 관련 방 56개의 멤버 수를 중복 계산 없이 단순히 합산한 것이다. 한 사람이 여러 방에 동시에 가입할 수 있고, n번방과 직접 무관한 방도 포함됐다. 추적단 불꽃이 스스로도 "동시접속자 26만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공식 논평을 냈다. 경찰이 실제 입건한 수는 2,454명이다. 26만과 2,454명 사이엔 100배 이상의 격차가 있다.
이 수치는 양방향으로 왜곡됐다. 한쪽에서는 "한국 남성 100명 중 1명이 가담자"로 확산했고, 반대쪽에서는 그 과잉 주장을 공격하면서 "20대 여성이 남성 혐오를 퍼뜨린다"라는 역공의 근거가 됐다. 진실은 두 과장 사이 어딘가에 있는데, 양쪽 모두 그 진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투표 데이터도 다시 봐야 한다. 2021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20대 여성의 40.9%는 오세훈을 찍었다. 2022년 대선에서 20대 여성의 33.8%는 윤석열을 지지했다. "이대녀는 다 민주당"이 얼마나 근거 없는 소리인지는 이 수치 하나로 충분하다. 시사IN 2021년 조사에서 자칭 페미니스트라는 20대 여성은 41.7%였는데, 같은 조사에서 69.6%가 "소수의 극단적 주장이 페미니즘으로 과대 대표되고 있다"라고 답했다. 즉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 중에서도 다수가 극단적 주장에 거리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320만 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대남 극우화 담론과 이대녀 페미니스트 몰아가기는 겉으로는 반대편을 겨냥하지만, 작동 방식은 완전히 같다.
소수의 극단적 사례를 선별해서 다수를 정의한다. 수십만 명 중 가장 시끄럽고 자극적인 게시물 몇 개가 전체의 '민낯'으로 유통된다. 알고리즘은 자극적인 것을 증폭시키고, 언론은 그 증폭된 것을 다시 보도하며, 정치인은 그 보도를 선거 전략의 재료로 쓴다.
그 결과 실제로 피해를 보는 건 극단층이 아니다. 정치에 별 관심 없는 평범한 20대 남성이 "잠재적 파시스트" 취급받고, 짧은 머리를 한 여성이 길에서 폭행을 당한다. 아무 관계도 없는 광고 속 손 모양이 사상 검증의 대상이 되고, 게임 회사 직원이 혐의조차 불분명한 이유로 해고 요구받는다.
이 두 과잉일반화는 또 다른 공통점을 가진다. 실제 문제를 가린다는 것이다. 청년 세대가 공통으로 짓눌리는 문제들. 즉 취업 절벽, 주거 불가능, 학자금 부채, 사회 이동성 봉쇄 같은 것들은 "이대남 대 이대녀" 프레임이 지배하는 동안 의제에서 밀려난다. 정치권에서 여가부 폐지라는 공약이 나오고, 청년 여성 지원 예산을 늘리겠다는 발표가 나오고, 그사이 청년 모두를 짓누르는 구조적 문제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이화여대 이주희 교수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편이 낫겠다. "정치권에서 성별 갈라치기는 우리 사회 중요한 갈등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계급 갈등, 일자리 부족, 저임금, 노동의 질 약화 등의 문제를 기업과 정부가 아닌 남녀 청년이 싸우게 만든다." 나는 이 말이 지금 한국 정치의 핵심 문제를 정확히 짚었다고 생각한다.
"이대남을 잡아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떤 진영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맥락은 다르지만, 공통으로 이 집단을 선거 전략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이대남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가 아니라, "왜 청년들이 성별로 갈라서는 것이 정치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갈등 표출 경로가 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이 나오면 그것을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
20대 남성이 느끼는 '불공정함'은 실재한다. 군복무 기회비용, 취업 시장에서의 경쟁 압박, 전통적 남성 역할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 이것들은 "찌질한 불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조건이다. 동시에 20대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도 실재한다. 노동시장의 유리천장, 경력 단절의 구조화, 일상적 안전 불안. 이것도 "과장된 피해의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조건이다.
두 조건은 경합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세대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동시에 겪는 고통이다. 그런데 지금 담론 구조는 이 두 고통을 "어느 쪽이 더 억울한가?" 경쟁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경쟁에서 이겨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권에 요구해야 할 것은 명확하다. 20대 남성 집단의 내부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실제로 정책 수요가 무엇인지 정밀하게 조사하라. 20대 여성 집단도 마찬가지다. 단일한 페미니즘 블록이 아니라, 지역·학력·계층에 따라 전혀 다른 현실을 사는 320만 명의 수요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라. 그리고 "이대남 표를 잡기 위한" 공약이 아니라, 청년 세대 전체의 삶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정책을 설계하라.
지금처럼 여가부 폐지 7글자를 SNS에 올려서 이대남 표를 긁어모으고, 유리천장 발언 한마디로 이대녀 표를 노리는 방식은 선거 전략이지 정치가 아니다. 선거가 끝나면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대남 담론을 비판한다고 해서 20대 남성의 불만을 무시하자는 게 아니다. 이대녀 일반화를 비판한다고 해서 젠더 불평등이 없다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 260만 명을 커뮤니티 게시판 몇 개로 정의하지 마라. 320만 명을 활동 회원 20만짜리 카페로 정의하지 마라. 그 숫자들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지워버리는 건 분석이 아니라 정치적 도구화다.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특정 세대를 "쓸어버려야 할 집단"으로 보는 순간, 그 사람이 가장 혐오한다는 배제와 혐오의 논리를 스스로 반복하게 된다. 우파도, 좌파도, 그 어느 진영도 예외가 없다.
청년 세대는 선거판의 흥미로운 변수가 아니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들이 왜 지금 이런 선택을 하는지를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 그리고 그 물음에 정책으로 답하는 것. 그게 정치의 기본이다. 기본도 안 되면서 세대 담론만 요란한 나라에서, 청년들이 냉소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