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는 보수였던적이 없다

by Edward Alistair Langford
8bb6da33-c665-45e6-8208-301525c03de3.jpg


오해를 먼저 차단하고 시작하겠다.


이 글은 보수를 욕하려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보수가 잘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제대로 된 보수 정치가 한국에 뿌리내리기를 바라고, 그 보수가 오래 집권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지금 보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들에 대해 할 말이 있다.


한국에서 보수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대답이 제각각이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면 보수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세금을 적게 걷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보수라는 사람도 있다. 시장에 국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지지하는 것이 보수라는 사람, 작은 정부를 지지하면 보수라는 사람, 국민의힘을 지지하면 보수라는 사람, 민주당을 싫어하면 보수라는 사람. 심지어는 부정 선거론을 믿고 윤어게인을 외치면 보수라는 사람까지. 이 기준들은 서로 충돌한다. 작은 정부를 외치면서 국가 주도 개발을 숭배하고, 법치를 말하면서 헌정을 파괴한 대통령을 옹호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의 철학 아래 묶이는가.


답은 간단하다. 묶이지 않는다. 한국에서 보수라는 말은 하나의 철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진영 소속감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렸다. 철학이 아니라 팀명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보수주의가 원래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에드먼드 버크는 보수주의의 시조로 불린다. 그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한 것은 변화 자체를 거부해서가 아니었다.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추상적 원칙을 근거로 수백 년간 축적된 제도와 질서를 하룻밤 사이에 파괴하는 방식에 반대한 것이었다. 버크가 말한 보수의 핵심은 현상 유지가 아니었다. 지킬 가치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판단력이었다. 예컨대 영국의 의회 전통과 보통법 체계는 지켜야 할 것이었고, 왕의 자의적인 권한의 남용은 걷어내야 할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검증된 제도와 질서를 존중하되, 변화가 필요할 때는 그 제도의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개혁한다. 급진적 파괴를 거부하는 이유는 변화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추상적 원칙으로 기존 질서를 한꺼번에 뒤엎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 기준으로 한국 보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독재를 추구했고, 자유당은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4·19 이후 장면 내각 시기에 민주적 질서를 공고히 할 기회가 있었지만, 신구파 계파 갈등 속에서 그것을 살리지 못했다. 그 혼란을 군부가 채웠다. 5.16은 보수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군부 쿠데타가 민간 정치 전체를 압도한 사건이었고, 보수 세력은 그것을 막지 못한 채 점차 그것에 흡수됐다. 10·26 이후 또 한 번의 기회가 왔지만, 전두환의 등장을 막지 못했고 다시 군부 권위주의가 이어졌다. 이 반복의 역사가 오늘날 한국 보수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하면서 그 이미지에 쐐기를 박았다.


이것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헌정 질서의 훼손이다. 권력 분립의 파괴다. 법치의 무시다.


그런데 헌정 질서, 권력 분립, 법치야말로 버크적 보수주의가 가장 먼저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들이다. 한국 보수는 보수주의가 지켜야 할 핵심을 반복적으로 파괴해 왔다. 이것은 보수가 실패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보수주의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한국 보수의 실제 뿌리는 버크적 보수주의가 아니다. 반공 냉전 이데올로기, 개발독재 국가주의.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수입된 신자유주의의 혼합물이다. 이 세 요소는 서로도 정합성이 낮고, 보수주의 철학과도 거리가 멀다. 반공이라는 감정적 귀속감, 성장이라는 성과주의, 시장이라는 이념적 수입품이 뒤섞인 것에 보수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이것을 지적하면 오만하다는 말을 들을 것을 안다. 엘리트주의라는 말도 들을 것이다. 그 비판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오만한 진단이라도 맞는 진단이라면 외면하는 것이 더 나쁘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어야 한다. 보수만이 지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진보는 변화를 설계한다. 그것이 진보의 강점이다. 그러나 변화를 설계하는 사람은 지키는 것에 약하다. 변화가 목적인 사람에게 기존 질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 보전해야 할 자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만이 진지하게 다룰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헌정 질서의 연속성이 그 첫 번째다. 민주주의는 선거 한 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절차와 관행의 산물이다. 그 축적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보수의 것이다. 두 번째는 세대 간 계약이다. 연금, 교육, 국방, 인프라는 현재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음 세대와의 약속이다. 지금 당장의 이익을 위해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하지 않겠다는 태도,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 사이의 파트너십이라는 버크의 언어가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다. 세 번째는 공동체의 유기적 질서다. 가족, 지역 공동체, 중간 집단들이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한다. 이것을 국가가 대체하려 할 때 생기는 문제를 경계하는 것이 보수의 감각이다. 네 번째는 변화의 속도 조절이다. 검증되지 않은 변화가 가져올 의도치 않은 결과를 경계하고, 변화가 불가피할 때도 기존 질서의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가는 것. 이것은 진보가 할 수 없는 역할이다. 진보가 액셀을 밟는 역할이라면 보수는 핸들을 잡는 역할이다.


이 역할을 제대로 하는 보수가 한국에 없었다는 것이 문제다. 그 자리를 기득권 수호 주의와 반공 감정 주의가 채워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보수의 개혁이 아니다. 개혁할 보수가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보수의 최초 정초다. 헌정 질서를 지키고, 권력 분립을 설계하며, 세대 간 계약을 진지하게 다루고, 공동체의 유기적 질서를 보전하는 것. 이것이 보수주의의 본래 원칙이고, 한국 정치에서 그것을 처음으로 구현하는 것이 과제다.


보수주의의 원칙을 한국 정치에서 처음으로 세우는 것. 이것이 한국 보수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라고 나는 본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 정치 전체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제대로 된 보수 없이는 제대로 된 진보도 없다. 견제하고 경쟁할 상대가 있어야 정치가 설계의 언어로 움직인다. 지금처럼 감정적 반동주의와 기득권 수호 주의가 보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한국 정치의 수준은 올라가지 않는다.


나는 보수가 잘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의 자칭 보수가 보수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전 13화남의 전쟁에 우리 군인을 보낼 이유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