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by Edward Alistair Langford

이름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더불어와 민주. 이 두 단어가 하나의 정당 이름 안에 들어 있다. 더불어는 함께라는 뜻이고, 민주는 민주주의라는 뜻이다. 이름이 곧 정체성의 선언이다. 그렇다면 이 당이 실제로 하고 있는 것들을 이 이름 앞에 세워놓고 물어보아야 한다. 지금 이 당은 더불어인가, 민주인가.


2016년 2월 23일. 박근혜 정부가 테러방지법을 직권 상정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108명 전원의 이름으로 필리버스터가 시작됐다. 9일간 192시간 27분. 세계 최장 기록이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12시간 31분을 혼자 발언했다. 민주당은 이 필리버스터를 소수의 목소리를 지키는 민주주의의 최후 수단으로 불렀다. 다수의 횡포에 맞서 소수가 합법적으로 저항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진수라고 했다.


4년 뒤 2020년 12월. 이번에는 처지가 바뀌었다. 국민의힘이 국가정보원법 개정에 반대하며 필리버스터를 시작했다. 민주당은 지난 10일 “야당을 존중한다. 필리버스터를 종료시키지 않겠다”라고 공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무기력했던 국민의힘이 전의를 불태우며 필리버스터를 연말까지 이어가려 하자, 거대 여당의 의석수를 앞세워 조기 종결에 나섰다. 사흘 만에 말을 뒤집었다. 공언한 지 72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이것이 이 당의 원칙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첫 번째 장면이다. 민주당이 말하는 원칙이란 결국 내가 소수일 때만 적용하는 것이고, 다수가 되면 편의에 따라 바꾸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언론은 “소수당의 합법적 견제 장치가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무력화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야당이던 시절 만든 논리로 여당이 된 민주당을 비판하는 아이러니인 셈이다.


그리고 2026년. 더불어민주당이 연내 필리버스터 제도 손질에 나섰다. 소수당 발언권을 제한하는 방향이다. 의사정족수 미달이면 표결로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킬 수 있게 하는 국회법 개정을 공언했다. 2016년에는 소수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192시간을 발언했던 당이 이제는 소수의 목소리를 법으로 잘라내겠다고 한다.


이것을 변화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다. 이것은 원칙의 부재다. 원칙이 있었다면 내가 소수일 때와 다수일 때 같은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 필리버스터가 민주주의의 보루라면 내가 다수일 때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라 권력을 잡기 위한 수사였을 뿐이다.


사법부를 향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의 구조를 갖는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사법부 독립을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말해왔다. 독재 정권이 사법부를 통제할 때, 정치 검찰이 반대 세력을 탄압할 때, 민주당은 사법부 독립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싸웠다. 그 싸움이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 명분이 지금 어디 갔느냐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법원장이 그리도 대단한가, 대통령 위에 있는가?”라고 공개 발언했다. 추미애 법제사법위원장은 “사법부보다는 입법부가 헌법적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사법부 독립을 말해온 당의 언어인가? 삼권분립은 어느 한 권력이 다른 권력 위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견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입법부가 사법부 위에 있다는 논리는 삼권분립의 부정이다. 그리고 민주당은 바로 그 삼권분립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다고 말해왔다.


민주당은 22대 국회 후반기 원 구성에서 18개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 전부를 차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야당 시절 상임위 배분을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으로 말하던 당이 여당이 되자 상임위 100% 독식을 선언했다. 국민의힘은 “일당 독재 선언”이라고 불렀다. 이 표현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민주당이 야당일 때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민주당은 이를 과연 뭐라고 불렀을까.


민주화 운동의 정신이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1980년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이 원했던 것, 1987년 거리에 나선 사람들이 요구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권력의 집중을 막는 것, 소수의 목소리를 보장하는 것, 어떤 권력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는 것, 절차를 지키는 것. 이것들이었다. 민주당은 그 운동의 계승자를 자처한다. 그렇다면 민주화 운동이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위해 싸워온 대상과 가장 닮은 행태가 어디서 나오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다수의 의석을 앞세워 소수의 토론권을 잘라내는 것, 사법부 위에 입법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 현직 대통령의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향으로 법원 구조를 바꾸는 것. 이것들은 민주화 운동이 싸운 것들과 방향이 같은가, 반대인가.


또한 팬덤 정치의 문제는 그것이 단순히 열성 지지자의 존재라는 점이 아니다. 팬덤이 당의 실질적 의사결정을 지배할 때 발생하는 문제다. 한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이재명 대통령의 팬카페인 재명이네 마을이 정청래 민주당 대표를 강제 탈퇴 처리했다. 같은 카페가 이성윤 최고위원도 강제 탈퇴 처리했다. 그리고 최민희 의원도 강제 탈퇴 처리했다. 최 의원이 강제 탈퇴가 된 이유는 이렇다. 이 대통령과 정 대표의 악수 장면이 공식 영상에 담기지 않은 이유를 확인해 보겠다고 게시판에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팬덤의 두 계파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실 확인에 나서겠다고 한 것이 강제 탈퇴의 이유였다. 투표는 4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256대 72. 이것이 지금 민주당을 둘러싸고 있는 팬덤의 실체다. 현직 국회의원이 팬카페에 가입해 있고, 그 팬카페가 현직 국회의원을 주민투표로 강제 탈퇴 처리한다. 국회의원은 헌법 제46조에 따라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하는 헌법 기관이다. 그 헌법 기관이 팬카페의 주민투표에 의해 자격이 심사된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것을 제어하지 않는다. 제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팬덤에 포획된 정당이 팬덤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여야가 합의한 특검안이 하루 만에 뒤집혔다. 개혁신당은 “대통령의 신중론도, 여당 지도부의 합의도, 결국 팬덤의 목소리에 무너졌다”라고 비판했다. 지도부가 합의한 것을 팬덤이 뒤집는다. 이것이 정당 정치인가, 팬덤 정치인가? 정당의 결정이 지도부가 아니라 팬덤에 의해 번복된다면 그 정당의 실질적 지도자는 누구인가?


다시금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돌아가 보자. 민주(民主)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국민은 누구인가. 팬덤의 언어에서 국민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반대하는 사람은 기득권이거나 적이다. 이것은 야에르너 뮐러가 말한 포퓰리즘의 정의. 즉 자신만이 진짜 인민을 대변한다는 독점적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더불어는 함께라는 뜻이다. 그러나 함께의 범위가 팬덤의 경계와 일치한다면, 그것은 함께가 아니라 편 가르기다. 소수당의 필리버스터를 잘라내는 것은 더불어가 아니다. 사법부에 입법부가 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민주가 아니다. 팬덤의 압박으로 의원의 양심 표결을 징계하는 것은 어느 민주주의의 원칙과도 맞지 않는다.


이름과 실체의 거리가 이 정도라면, 이 당의 이름은 정체성의 선언이 아니라 정체성의 위장이다.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 정신의 내용이 권력의 제약, 절차의 존중, 소수의 보호였다면, 지금 이 당은 그 정신의 계승자가 아니라 그 정신이 싸웠던 것의 대상에 가깝다.


보수가 보수주의를 코스프레했듯, 민주당은 민주주의를 코스프레하고 있다. 방향이 다를 뿐 구조는 같다. 이름은 있는데 내용이 없다. 명분은 있는데 원칙이 없다. 야당일 때와 여당일 때 기준이 다르다. 이것이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이름이 지금 놓인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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