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동구권은 왜 무너졌는가

by Edward Alistair Langford

경제가 먼저 병들었다. 정치가 그것을 감췄다. 그리고 역사가 청구서를 보냈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두고 오랫동안 두 가지의 상반된 서사가 경쟁해 왔다. 하나는 체제 내재적 실패론이다. 중앙 계획경제는 구조적으로 작동할 수 없었고, 소련은 그 모순이 임계점에 달했을 때 무너졌다는 시각이다. 또 다른 하나는 외부압력론이다. 레이건의 군비경쟁 압박과 유가 충격이 소련을 재정적으로 질식시켰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두 서사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은 역사를 단순화하는 것이라 본다. 소련의 붕괴는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여러 층위의 실패가 수십 년에 걸쳐 서로를 먹고 자라다가 한꺼번에 터진 사건인 것이다.


출발점은 경제다. 미제스가 1920년에 이미 이론적으로 예고했던 문제. 즉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합리적 자원배분이 불가능하다는 경제계산 불가능성 논제는 소련이라는 실험실에서 수십 년에 걸쳐 실증됐다. 가격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수백만 명의 소비자와 생산자가 각자의 선호와 희소성 판단을 실시간으로 집약한 정보의 신호다. 그리고 소련이 이 신호 체계를 폐기했을 때, 고스플란은 수천만 개 품목의 생산량과 배분을 인위적으로 계산해야 했고,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성적 공급 부족, 암시장의 번성, 공식 경제와 실제 경제의 깊은 괴리.


하이에크가 덧붙인 통찰은 더 근본적이다. 경제에 필요한 지식은 본질적으로 분산되어 있고 상당 부분은 언어로 표현하기조차 어렵다. 어느 공장의 기계가 곧 고장 날지, 특정 지역의 작황이 어떤지, 어떤 소비자가 어떤 품질을 얼마나 절박하게 원하는지는 현장에 있는 사람만이 안다. 이것을 중앙으로 끌어올려 처리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정보의 문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센티브 구조가 동시에 무너졌다. 코르나이가 개념화한 연성 예산제약. 즉 기업이 손실을 내도 국가가 메워주리라는 구조적 기대는 모든 경제 주체의 행동 동기를 근본적으로 왜곡했다. 공장 관리자에게 합리적인 행동은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상관에게 잘 보이는 것이었다. 콜호스의 농민들이 공동 경작지에서는 대충 일하면서 개인 텃밭에서는 놀라운 생산성을 보인 것은 이 원리의 상징적 현실판이다. 소련 전체 농지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던 개인 텃밭이 전체 채소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담당했다는 통계는 체제가 스스로 고발한 증거였다.


그렇기에 1950~60년대 소련이 실제로 빠르게 성장했다는 사실은 이 분석의 반례가 아니라 오히려 체제의 한계를 더 정확하게 드러내는 단서다. 단순한 수량 증대. 즉 더 많은 철강과 시멘트와 전력을 생산하는 단계에서는 강제적 자원 집중이 효과를 낼 수 있다. 소련이 우주 경쟁과 군비에서 서방과 겨룰 수 있었던 것도 국가가 자원을 강제로 집중할 수 있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가 복잡해지면서 품질과 다양성과 혁신이 성장의 핵심 변수가 되는 순간, 계획경제는 구조적 한계에 봉착한다.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 한마디로 새로운 기업과 기술이 낡은 것을 끊임없이 대체하는 과정이 계획경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혁신에 성공해도 보상이 없고, 실패해도 퇴출당하지 않으며, 기존 구조를 뒤흔드는 새로운 진입자를 위한 공간도 없었다. 소비재, 전자기기, 서비스 산업에서 소련이 서방에 구조적으로 뒤처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또한 1970년대에 석유 수출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던 시기는 이 구조적 침체를 가렸다. 오일달러가 들어오는 동안 소련 지도부는 개혁의 유인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1985~86년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서 이 완충재가 사라졌다. 숨겨져 있던 균열이 한꺼번에 드러나게 되었다.


경제적 실패는 정치 체제의 특성에 의해 더 심해졌으며, 소련의 일당 독재는 체제 내부의 자기 교정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스탈린의 대숙청이 남긴 가장 치명적인 유산은 수백만 명의 목숨이 아니라, 직언하는 관료의 멸종이었다. 공포 체제에서 형성된 허위 보고 문화는 스탈린 사후에도 수십 년간 지속됐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예스맨 관료 문화는 스탈린이 심어놓은 씨앗의 수확이었다.


뷰캐넌이 공공선택론에서 지적했듯, 정부 관료도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행위자다. 시장경제에서 이 자기 이익은 경쟁을 통해 사회적으로 유익한 방향으로 유도되지만, 계획경제에서는 그것이 부패와 족벌주의와 정치적 줄서기로 표출된다. 배급권을 쥔 관료, 생산 할당량을 조작하는 공장장, 공급 정보를 독점한 지역 당 간부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할 때 체제 전체의 자원 배분은 합리성과 점점 더 멀어진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정체(Застой)'는 이 부패의 제도화였다. 개혁도 하지 않고 현상 유지만 추구하는 동안, 체제에 대한 내부적 신뢰는 서서히 소진됐다. 결국 그렇게 소련의 정당성은 세 가지의 원천을 차례로 잃어갔다. 스탈린·레닌의 카리스마적 권위는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로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공산주의 미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약속은 경제 침체가 현실화하면서 허구가 됐다. 마지막으로 남은 실적 정당성. 즉 "우리 체제가 더 잘 살게 해준다"라는 주장마저 1970년대 이후 서방과의 생활 수준 격차가 가시화되면서 무너졌다.


구조가 무너질 조건을 만들었다면, 고르바초프는 그 붕괴를 가속한 행위자였다. 그의 의도는 체제의 붕괴가 아니라 체제의 구제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결과는 정반대였다.


글라스노스트는 수십 년간 억압됐던 민족주의와 반체제 여론을 통제 불가능한 방식으로 해방시켰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기존 계획경제를 해체하되 시장경제는 아직 작동하지 않는 전환기적 혼돈을 초래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오류는 순서였다. 정치 자유화를 경제 개혁보다 먼저 시행함으로써, 개혁에 저항하는 강경파를 제압하기 위해 도입한 의회 권력이 오히려 연방의 구심력을 해체하는 도구가 됐다.


이건 중국이 시장화를 먼저 하고 정치 개방을 통제한 것과 정반대의 순서였다. 물론 소련이 중국식 권위주의적 경제 개혁이 가능한 구조였는지는 별개의 논쟁이다. 왜냐하면 민족 구성과 체제 역사와 엘리트 구조가 달랐으니까. 그러나 최소한 고르바초프의 시퀀싱 오류가 붕괴의 임계점을 앞당겼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경제와 정치의 서사에 가려 종종 과소평가되는 변수가 있다. 그건 바로 민족주의다.


소련은 역설적으로 민족 정체성을 스스로 제도화했다. 각 공화국의 민족 언어와 문화를 일정 부분 공식화하는 정책이 장기적으로는 민족 정체성의 조직적 기반을 소련 체제 내에 내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스탈린이 자의적으로 그은 국경선들, 체첸과 크림 타타르 등에 대한 집단 강제 이주,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의 역사적 트라우마는 소련 해체의 순간 즉각 폭발할 준비가 된 화약고였다.


그렇기에 발트 3국의 독립운동이 가장 먼저,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소련은 경제 실패 이전에 이미 자신들을 점령하는 중인 체제였다. 나고르노-카라바흐, 크림반도, 체첸. 이 분쟁들은 경제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수십 년간 억압됐던 민족적 원한이 글라스노스트의 균열을 뚫고 터져 나온 것이니까.


이번엔 동유럽의 붕괴에 대해 다루겠다. 소련의 붕괴와 동유럽의 붕괴를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동유럽 위성국가들의 경우, 체제 내재적 모순에 더해 결정적인 외부 변수가 작동했다. 고르바초프가 브레즈네프 독트린. 즉 소련이 개입해 사회주의 정권을 보호한다는 원칙을 명시적으로 포기한 순간, 헝가리·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파와 반체제 세력에게 길이 열렸다. 폴란드에서 솔리다르노스치가 1980년대 내내 조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 개입 위협이 약화하는 맥락과 맞물려 있었다.


그렇기의 동유럽의 붕괴는 "외부 후원자의 철수 + 내부 반체제 역량의 폭발"의 결합으로 생겨난 결과다. 내재적 모순만으로는 그 타이밍과 형태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하여 글의 내용을 요약하겠다.


중앙 계획경제는 가격 신호를 파괴함으로써 합리적 자원배분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연성 예산제약은 모든 경제 주체의 행동 동기를 왜곡했다. 창조적 파괴의 부재는 장기적 혁신 역량을 소진했다. 공포 체제가 만들어낸 허위 보고 문화는 체제의 자기 교정 기능을 파괴했다. 석유 의존 구조는 개혁의 유인을 제거했고, 유가 충격은 이 모든 모순을 한꺼번에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스탈린의 민족 정책은 해체의 형태를 각인했고, 고르바초프의 시퀀싱 오류는 붕괴의 타이밍을 앞당겼다. 그리고 소련의 보호막이 걷히는 순간, 동유럽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이 실패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았다. 정보가 없으니 인센티브를 설계하기 어렵고, 인센티브가 무너지니 혁신이 일어나지 않으며, 혁신이 없으니 체제가 경직되고, 경직된 체제는 더더욱 정보를 왜곡한다. 하나의 악순환이 다른 악순환을 낳는 구조였다. 사회주의 이념 자체가 이 모든 것의 원흉이었느냐는 별개의 논쟁이다. 민주사회주의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고, 중국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시장을 도입해 다른 경로를 걷고 있다. 그러나 중앙 계획경제와 일당독재와 민족 억압이라는 특정 제도의 묶음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더 좋은 사람들이 운영했다면 달랐을 것"이라는 반론은 이 구조적 연쇄를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치환한다. 설득력이 없다. 체제의 실패는 인간의 실패가 아니라 제도 설계의 실패였다. 소련은 나쁜 사람들이 무너뜨린 게 아니다. 잘못 설계된 제도가 좋은 사람조차 나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구조 속에서 스스로 무너졌다.

이전 18화지역주의해소를 위한 정책 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