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말 공화국에 살고 있는가

by Edward Alistair Langford

공화국이란 건 단순히 왕이 없는 나라를 의미하진 않는다. 공화주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필립 페팃이 정식화한 비지배의 원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배란 타인의 의지를 자의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구조적 능력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간섭이 발생했느냐가 아니라, 그런 간섭이 언제든 가능한 관계 자체가 성립해 있느냐다. 또한 페팃의 기준에서의 자유란 단순히 방해받지 않는 상태(비간섭)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자의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이 기준을 공론장에 적용했을 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풍경은 불안하다.


1974년 독일의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엘리자베스 노엘레-노이만은 침묵의 나선이란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여론의 기후를 탐지하고, 자신의 의견이 소수라고 판단되는 순간 사회적 고립에 대한 공포를 느껴 침묵을 선택한다. 반대로 다수 의견의 지지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주류 의견은 실제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보이게 되고, 소수 의견은 실제보다 훨씬 왜소하게 쪼그라든다. 2014년 퓨 리서치 센터가 에드워드 스노든 폭로 사건을 대상으로 수행한 대규모 연구에서도, 소셜 미디어는 다양한 의견이 분출되는 대안적 공론장이 되기는커녕 이 침묵의 나선을 더 가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이 속한 네트워크의 지배적 분위기와 자신의 의견이 일치할 때만 사람들은 입을 열었다.


이것이 단순한 심리적 현상에 그친다면 문제는 덜 심각하다. 하지만 현대의 온라인 공론장에서 이 나선은 알고리즘과 집단 압력이라는 두 엔진으로 구동된다.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은 감정적 반응을 유발하는 콘텐츠를 증폭시키고, 이미 우세한 의견에 더 많은 가시성을 부여한다. 여기에 집단적 비난, 계정 신고, 낙인찍기가 더해지면 비주류 의견을 가진 개인은 논리적 반박을 당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배제의 위협을 받게 된다. 한마디로 논쟁에서 지는 것이 아니라, 공론장에서 존재 자체가 지워질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왜 페팃적 의미의 '지배'인가?


여기서 중요한 개념적 구분이 필요하다. 단순한 비난이나 감정적 공격이 모두 페팃 기준의 지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페팃이 말한 지배란 개념은 상대의 의지를 자의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구조적 능력을 요건으로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집단 압력은 그 기준을 충족하는가?


그리고 오늘날의 집단 압력은 명백히 이 기준에 충족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대 온라인 공론장에서 집단적 낙인찍기와 매장 시도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상대의 평판, 직업, 사회관계망을 실질적으로 훼손할 수 있는 구조적 수단으로 작동한다. 특히 한국에서 드루킹 사건이 보여주듯, 조직적 여론 조작은 특정 의견이 여론장에서 아예 작동하지 못하도록 구조적으로 배제하는 효과를 낳는다. 개인이 아무리 논리적 주장을 내놓아도, 그 주장이 닿기 전에 신뢰 자체가 집단으로 파괴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감정 교환이 아니라 발화의 구조적 봉쇄로서 작동한다. 이를 페팃의 언어로 말하면, 자의적 간섭의 능력이 구조적으로 특정 진영에게 집중된 상태. 즉 지배가 성립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구조에만 있지 않다. 공론장의 내용 자체도 병들어 있다. 오늘날 많은 공적 논쟁은 논리와 증거의 싸움이 아니라 도덕적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감성 경쟁으로 변질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선하고 저들은 악하다'는 서사가 논증을 대체한다. 상대의 철학적 근거나 논리적 입장은 검토되지 않은 채, 적절한 라벨 하나면 논쟁 자체가 종결된다. "파시스트", "기득권", "꼴페미", "한남" 등등. 이 라벨들이 논리를 대체하는 순간, 공론장은 숙의의 공간이 아니라 정체성 전쟁의 전장이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단순한 예의의 문제는 아니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이상으로 제시한 공론장은 참여자들이 오직 더 나은 논거의 힘에만 복종하는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상이 무너지면 무엇이 남는가? 결국 더 큰 목소리, 더 결집한 집단, 더 강한 사회적 처벌 능력을 갖춘 쪽이 이기는 권력 게임이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공화주의적 공론장이 아니라, 오히려 하버마스가 경고했던 공론장의 재봉건화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다수결 원칙에 기반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위험한 방식으로 오용된다. 다수결은 합법적 의사결정의 절차적 규칙이지, 소수 의견을 논리적 근거 없이 침묵시켜도 된다는 허가증이 아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일찍이 자유론에서 이 위험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다수의 의견이 틀릴 수도 있고, 소수의 의견이 후대에 진리로 판명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토론은 다수의 관용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성적 자기 교정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현재의 공론장이 이 원칙을 얼마나 존중하는지는 자명하다. 주류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발화 자체가 봉쇄될 때, 다수결은 진리 탐구의 도구가 아니라 지배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 지배가 제도가 아닌 여론의 집단 압력에 의해 행사된다는 점이 오히려 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다. 제도적 억압은 법으로 바꿀 수 있지만, 문화적 지배는 훨씬 더 끈질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화국인가? 이 질문에 단답형으로 말하기 전에 한 가지를 분명히 하고 싶다. 공화국성은 이분법적 기준은 아니라고 말이다. 현행 헌법 체계, 선거 제도, 사법부의 독립성 등 제도적 차원에서 한국은 공화국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공화국의 실질은 제도 위에 서 있는 시민적 공론의 질에도 의존한다.


여기서 페팃은 비지배의 공화주의를 단순히 제도를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시민들이 공론의 장에서 실질적으로 자의적 지배를 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발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보자면, 오늘날 한국의 공론장은 공화주의적 이상으로부터 상당히 후퇴해 있다. 제도는 공화국이나, 공론장의 실질은 지배가 작동하는 준공화국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의 진단이 아니라 공론장의 질이 문화이고 문화는 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변화의 전제는 정확한 진단이다.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냉정하게 직시하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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