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좌파를 지지할 수 없는가

by Edward Alistair Langford

먼저 이것을 분명히 하겠다. 이 글은 좌파 일반을 적으로 규정하는 글이 아니다. 좌파가 제기하는 문제들. 즉 불평등, 노동 착취, 사회적 약자의 방치 등 이것들이 실재하는 문제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 문제들을 외면하면서 보수를 말하는 것은 사기를 치는 것과 같다. 내가 지지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과 그 방식 뒤에 깔린 세계관을 지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출발점을 이렇게 놓겠다. 나는 왜 좌파의 진단에 공감하면서도 좌파를 지지하지 않는가.


첫 번째 이유는 좌파는 제도를 불신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수를 정초하고자 할 때 가장 중심에 두는 것은 하나다. 자의적 권력이 특정 인간이나 집단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구조를 설계하는 것.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 혁명을 반대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는 혁명의 목표가 나쁘다고 한 게 아니었다.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제도와 관행을 한순간 이성으로 해체하고 새로 설계하겠다는 오만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걸 생각해 본다면 좌파의 논리 구조는 항상 비슷하다. 기존 제도는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뒤집어야 한다. 이 논리가 단순히 틀렸다고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기존 제도가 기득권에 유리하게 작동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기존 제도를 해체한 자리에 무엇을 놓을 것인가. 좌파의 답은 대체로 모호하다. 더 공정한 구조, 더 평등한 사회. 그런데 그 구조를 설계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 판단의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이 물음에 좌파는 충분히 답하지 못한다.


필립 페팃의 비지배 자유 개념이 내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비지배는 단순히 간섭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 지배 가능성 자체를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좌파가 추구하는 강력한 국가 개입, 급진적 재분배, 기존 제도의 해체는 자의적 지배의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 권력이라는 형태로 그것을 증폭시킬 수 있다. 국가가 더 많은 것을 결정할수록, 그 국가를 장악한 세력의 권력은 커진다.


두 번째 이유는 좌파의 경제 정책은 의도와 결과 사이의 간극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좌파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면 흔히 돌아오는 말이 있다. "그럼 재벌을 지지하냐?"라는 말.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회피라고 본다. 재벌 구조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과 좌파의 경제 정책을 지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2017년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을 핵심 경제 정책으로 내걸었다. 임금을 올리면 소비가 늘고, 소비가 늘면 성장이 된다는 논리였다. 2017년에 6,470원이던 최저임금은 2019년엔 8,350원으로 29%가 올랐다. 취업자 수 증가 폭은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고, 실업자는 113만 3천 명으로 1년 전보다 13만 4천 명이 늘어 8월 기준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최저임금 상승과 근로 시간 단축은 노동시장에서 취약 계층의 고용 기회를 줄였고 그 결과 소득분배는 더 악화했다.


이것은 단순한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다. 임금이 이윤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 생산성이 먼저 올라야 임금이 오를 수 있다는 것은 경제학의 기초다. 좌파는 이 순서를 뒤집어 인과관계를 역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결과가 나쁘게 나오면 외부 요인 탓을 한다. 미국 금리 탓, 전 정부 탓, 코로나 탓. 이 패턴 역시 늘 반복된다.


내가 좌파 경제 정책을 경계하는 것은 시장을 신성시해서가 아니다. 나는 흑묘백묘론자다. 효과가 있으면 쓰고 없으면 버리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이론을. 심지어 멀쩡히 존재하던 기존의 이론을 자의적으로 왜곡해 도덕적인 열정으로 밀어붙이고, 실패의 증거가 나와도 수정하지 않는 것은 실용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다.


세 번째 이유는 한국 좌파는 계보 상의 문제를 아직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색깔론이 아니라 사실의 문제다. 한국 진보정당의 계보에서 NL(민족해방) 계열이 차지해 온 비중을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서 10명을 당선시키는 파란을 일으켰으나, 당내 양대 세력인 NL과 PD의 이념 차이, 다수파인 NL의 패권주의 등의 문제를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 NL 계열의 핵심은 반미 자주화와 북한에 대한 비판 회피 또는 적극적 옹호다. 통합진보당은 이석기 내란 음모 사건으로 헌법재판소에서 해산됐다. 이것이 한국 진보정당 역사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좌파 계열 내부의 문제라고 본다.


물론 이석기와 통합진보당이 한국 좌파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정의당, 녹색당, 진보당 계열은 그것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거리두기가 매우 선명하게 이루어졌는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한반도 안보 문제에서 한국 좌파 전반은 북한의 핵 개발과 도발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는가. 대북 전단 살포 금지, 남북 군사합의서, GP 일방 폭파, 이런 정책들을 좌파 진영은 어떻게 평가했는가.

나는 공화국의 안보 기반을 흔드는 세력과 함께 제도를 설계할 수 없다. 이것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국가 존속의 조건에 관한 판단이다.


네 번째 이유로는 좌파의 변화 방법론은 숙의를 건너뛰기 때문이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가 아니라 변화의 방식을 문제 삼는 보수다. 버크가 말했듯, 변화는 개혁이어야지 혁명이어서는 안 된다. 개혁은 기존의 것을 보존하면서 점진적으로 고치는 것이고, 혁명은 기존의 것을 해체하고 새로 만드는 것이다.


좌파의 변화 방법론은 종종 혁명의 문법을 따른다. 빠른 변화, 근본적 해체, 이상향의 선언. 그런데 사회는 정밀한 기계가 아니다. 어느 한 부품을 바꾸면 다른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면 자영업자가 직격탄을 맞는다. 비정규직을 일거에 정규직화하면 신규 채용이 줄어든다. 의도는 선했으나 설계가 부실했다. 그리고 그 설계의 부실함은 현장 사람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지 않은 데서 온다. 숙의를 건너뛴 열정은 피해를 만든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 좌파가 주도하는 변화는 흔히 도덕적 정당성을 전제로 절차를 압축한다. 이것이 옳은 일이니 빠르게 해야 한다는 논리. 그러나 어떤 변화가 옳은지는 사전에 알 수 없다. 그것이 옳은지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숙의 과정을 거쳐야만 판단할 수 있다. 그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목표가 선하다고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면, 그 논리는 어떤 권위주의도 정당화할 수 있다.


다섯 번째 이유는 나는 도덕을 공적 제도 설계의 기준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좌파와 내가 가장 근본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다. 좌파의 정치적 언어는 도덕적 언어와 매우 가깝다. 불평등은 부끄러운 것, 차별은 나쁜 것, 약자를 외면하는 것은 죄. 이 언어가 틀렸다는 게 아니다. 나 역시도 그 도덕적 판단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도덕적 언어로 정치를 운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내 판단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반론을 쉽게 수용하지 않는다. 내가 옳으니 상대는 악하다는 논리가 쉽게 따라온다. 타협은 악과 타협이 되고, 절차는 선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이것이 좌파 정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다. 적대 구도가 쉽게 만들어지고, 이견은 배신으로 분류된다.


나는 공적 제도의 설계에서 도덕적 확신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도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을 전제해서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 충돌하면서도 공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그래서 버크는 인간 이성의 오만을 경고했고, 페팃은 지배 가능성의 구조적 차단을 주장했다. 도덕이 아니라 제도가 비지배를 보장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좌파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이 거짓이어서가 아니다. 그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이 내가 가진 제도와 절차와 점진적 변화에 대한 신뢰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제도를 불신하고, 숙의를 건너뛰고, 도덕적 확신으로 급격한 변화를 밀어붙이는 것은 지금 당장은 선의로 포장되더라도 그것이 만들어내는 구조는 언제든 자의적 권력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좌파의 문제의식을 존중하되 그 방법론을 거부하는 것. 이것이 제도 보전 주의자로서 내가 서 있는 자리다.

이전 19화소련과 동구권은 왜 무너졌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