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출산 갤러리의 자기기만에 대하여

by Edward Alistair Lang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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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출산 마이너 갤러리(이하 무출산갤)를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그 분위기에서 묘한 일관성을 느낀다. 한국 사회를 '조선'으로 부르며 경멸하고, 노동을 거부하는 '탕핑'을 미덕으로 삼으며, 출산 기피를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규정하는 이들의 언어는 분명 어떤 한 가지 세계관의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체계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안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라는 것이다.


무출산갤이 내세우는 철학적 거점은 두 가지다. 중국발 '탕핑'과 반출생주의(Anti-natalism). 둘 다 사상적 계보가 존재하는 개념이니 이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무출산갤이 이 개념들을 어떤 방식으로 전유하고 있느냐다.


탕핑은 원래 중국의 996(오전 9시~오후 9시, 주 6일) 노동 문화와 끝없는 성과 경쟁에 지친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최소한의 삶을 선택하겠다는 흐름이었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적어도 "덜 욕망하겠다"라는 능동성이 있었다. 그런데 무출산갤의 탕핑은 다르다. 이들의 게시글을 실제로 살펴보면 탕핑의 핵심 조건. 즉 자립적 생존이 빠져 있다. 퇴사했더니 만성질환이 나았다는 글, 직장이 만병의 근원이라는 글, 조선인과 엉키지 않으니 치유됐다는 글이 추천을 여러 개씩 받아 개념 글로 향한다. 그리고 이들이 탕핑 이후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스스로 생산하지 않고 국가 시스템을 조롱하면서 그 시스템 위에 기대어 사는 구조. 즉 대부분은 부모의 경제력에 얹혀사는 삶이 그 빈칸을 채우고 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저항이 아니라 기생이다. 체제를 혐오한다고 말하면서 그 체제가 낳은 부모의 노동과 저축 위에서 살아가는 모순을 이들은 철학이라는 언어로 포장한다.


또한 무출산갤의 언어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인'이라는 호칭이다. 이들은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이른바 '조선인'들의 이기심, 기만성, 폭력성, 천박함을 일상적으로 비판한다. 오늘 올라온 글 하나를 보면, 수리기사에게 컴퓨터 부품을 속아서 바꿔치기 당한 경험을 "조선인들은 지식의 격차를 이용해 남을 등쳐먹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라고 일반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서술은 자신의 개별 경험을 민족적·국민적 본질 담론으로 급조하는 논리적 도약이라고 밖엔 볼 수 없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 글을 쓴 사람 역시 한국인이다. 그런데 무출산갤의 유저들은 자신들 역시 자신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조선인'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이들의 답은 암묵적으로 자신을 '조선인과는 다른 각성한 개인'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 예외화는 사실 무출산갤 담론의 작동 방식 전체를 지탱하는 심리적 장치로 작용한다. 그러나 타인의 기만성을 고발하는 자신이 과연 그보다 더 정직한지를 입증할 방법이 없으며, 이들이 비판하는 '영포티'나 '인싸호소인' 역시 자기 합리화의 틀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무출산갤 유저 자신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다.


또 무출산갤이 안티나탈리즘을 진지하게 수용한다면, 그것은 모든 생명의 탄생이 고통의 시작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전제를 일관되게 유지하면 출산 거부는 국적이나 민족을 가리지 않는 보편적 원칙이 된다. 그런데 무출산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이 선호하는 일본 사회의 출산율 하락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하거나 "그래도 한국보단 낫다"라는 식으로 처리하고, 유럽의 저출생은 페미니즘의 결과라고 비판의 방향을 바꾼다.


즉 무출산갤의 반출생주의는 보편적 철학이 아니라 '한국'을 망하게 하려고 선택한 도구다. 그리고 철학이 수단으로 사용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철학이 아니다. 이들의 안티나탈리즘은 자신들이 경험한 한국 사회에 대한 원한을 사상의 언어로 번역한 것에 가깝다고 보인다. 원한이 사상을 흉내 내는 것. 이것이 무출산갤 담론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묘사다.


그리고 무출산갤은 내부적으로 운영진의 강력한 통제로 유지된다. 일본에 대한 비판적 게시물은 즉시 삭제되고, 이의를 제기하는 유저는 차단된다. 이것은 단순히 갤러리 문화의 특성이 아니라, 이 공동체가 실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물리적 구조로 강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갤러리 내에서 '일본은 한국보다 낫다'라는 명제는 반박 불가능한 공리로 설정되어 있다. 이 공리가 흔들릴 수 있는 정보는 운영 차원에서 제거된다.


결국 이 구조 안에서 개별 유저들은 자신이 '비판적 시각을 가진 각성한 개인'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들만의 정통 교리를 가진 작은 종파 안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 있다. 이것은 주류 사회의 확증 편향을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더 촘촘하게 통제된 확증 편향의 생태계를 구축했다는 역설로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무출산갤 담론의 가장 날카로운 맹점은 바로 이것이다. 이들의 '저항'. 즉 탕핑, 무출산, 탈조선 지향은 실천되는 순간 그 비용을 타인에게 전가할 수밖에 없다. 탕핑을 선언한 이후 생계가 유지되는 구조가 부모의 부양이라면, 이들이 거부한다는 '조선 시스템'을 평생 버티며 노동한 부모 세대가 그 저항의 물질적 토대가 된다. 자신들이 조롱하는 '영포티' 세대의 등골 위에서 체제 저항을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탈조선을 외치는 유저 중 실제로 이민에 성공한 비율. 혹은 경제적으로 독립한 상태에서 탕핑을 실천하는 비율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갤러리의 글 생태계. 이를테면 퇴사하고 행복하다는 글, 직장이 병의 근원이라는 글, 회식 문화를 비판하는 글에서 '이후의 삶'에 대한 구체적 서술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물론 무출산갤에는 분명 실제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고통이 있다. 한국 사회의 경직성, 노동 환경의 폭력성, 과잉 경쟁 구조에 대한 청년 세대의 분노는 합리적인 근거를 갖는다. 그 분노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출산갤이 선택한 방식. 그러니까 철학의 언어로 포장된 현실 회피, 타인에 대한 혐오를 각성으로 착각하기, 부모 세대의 부양에 기댄 채 체제를 저주하기 등등은 그 분노를 단 한치도 현실 너머로 데려가지 못한다. 이들은 조선의 안락사를 바라지만, 정작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그 '조선'이 60년 동안 쌓아 올린 경제적 유산이라는 점이 큰 아이러니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무출산갤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한계다. 체제를 무너뜨리고 싶다면 그 체제 밖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 능력 없이 내뱉는 파멸의 선언은 결국 자신의 무력함을 사상으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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