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포퓰리즘을 단순히 선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트럼프가 '잊힌 사람들'을 말했을 때, 보우소나루가 부패한 엘리트에 맞선다고 했을 때, 이재명이 기득권 카르텔을 해체하겠다고 했을 때, 그 말들이 울림을 가졌던 것은 그 안에 사실의 핵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러스트 벨트는 실제로 버려졌고, 브라질의 엘리트는 실제로 부패했으며, 한국의 기득권 구조는 실제로 폐쇄적이다. 포퓰리즘의 진단은 종종 맞다. 문제는 진단이 아니라 그다음이다.
포퓰리즘을 정치학적으로 정밀하게 규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카스 무데의 정의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특정 이념이 아니라 얇은 이데올로기다. 사회를 순수한 인민과 부패한 엘리트로 양분하고, 자신만이 그 인민의 진정한 의지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논리 구조다. 얀-베르너 뮐러는 여기에 반다원주의라는 핵심을 더한다. 포퓰리스트는 단순히 엘리트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진짜 인민의 바깥에 놓는다. '우리 편이 아니면 기득권이거나 배신자'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 정의가 중요한 이유는 포퓰리즘을 감정 일반과 구별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감정 동원이 포퓰리즘이 아니다. 인민의 독점적 대변자를 자처하며 반대를 배제하는 구조. 그것이 포퓰리즘이다.
이 구별이 없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역사적으로 민주화 운동, 노동권 투쟁, 시민권 운동도 기성 제도에 저항하는 대중 동원을 포함했다. 이것들도 포퓰리즘인가. 포퓰리즘 비판이 모든 대중 동원을 병리로 규정하면, 그 비판은 기성 질서를 수호하는 엘리트주의의 언어가 된다. 정당한 저항과 포퓰리즘적 선동을 가르는 기준은 감정의 유무가 아니라 다원성의 인정 여부다. 반대를 토론의 상대로 보느냐,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보느냐. 제도를 개혁의 대상으로 보느냐, 파괴해야 할 장애물로 보느냐. 이것이 기준이다.
트럼프와 보우소나루가 이 기준에서 포퓰리스트라는 것은 분명하다. 트럼프는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의회를 공격했으며, 사법부와 언론을 '인민의 적'으로 규정했다. 제도 자체를 자신의 권력에 복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당성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보우소나루는 집권 기간 내내 선거 제도의 신뢰성을 의심하게 했고, 군부의 개입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려 했다. 둘 다 무데가 말한 반다원주의의 전형이다. 이재명과 이준석의 경우는 이들과 같은 선상에 놓기 전에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사법 리스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거나 지지층의 감정을 동원하는 것이 포퓰리즘의 징후일 수 있지만, 이것이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수준에 이르렀는지는 별개의 판단이다. 포퓰리즘은 정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포퓰리즘이 왜 위험한가를 이 시리즈의 언어로 다시 말하면 이렇다. 자유론에서 말한 것처럼 자유는 자의적 지배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서만 성립한다. 포퓰리즘은 이 구조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 '인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제도적 제약을 해체하면, 그 뜻을 독점적으로 해석하는 권력자의 자의적 지배가 가능해진다. 공화론에서 말한 것처럼 권력은 인물이 아니라 절차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포퓰리스트는 이 절차를 인민의 의지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재정의함으로써 권력 제한의 논리 자체를 무력화한다. 2024년 계엄 사태가 보여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종북 세력 척결'이라는 감정적 서사가 헌정 절차를 압도하려 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공화론과 책임론에서 시민의 실질적 감시와 참여를 강조했고, 기본소득론에서 시민이 생존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참여는 필연적으로 감정을 동반한다. 불의에 대한 분노, 변화에 대한 열망, 연대의 감각이 없으면 시민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 마사 누스바움이 지적한 것처럼 감정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도덕적 인식의 형태이기도 하다. 불의를 불의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감정이다. 그렇다면 감정을 동원하는 것과 포퓰리즘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경계는 감정이 무엇을 향하는가에 있다. 감정이 제도의 개혁을 향할 때와 제도의 파괴를 향할 때는 다르다. 감정이 특정 정책에 대한 반대를 향할 때와 반대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때는 다르다. 감정이 더 나은 설계를 요구하는 에너지가 될 때와 설계를 대체하는 서사가 될 때는 다르다. 책임론에서 말한 것처럼 시민의 분노가 구체적인 제도적 요구로 이어질 때 그것은 민주주의의 동력이다. 그 분노가 '저 사람이 문제의 원인이니 없애면 된다'라는 단순 서사로 환원될 때 포퓰리즘이 된다.
포퓰리즘에 대한 대응을 시민 교육으로 환원하는 것은 위험하다. 누가 올바른 정치적 인식을 규정하고 그것을 교육하느냐는 질문이 남기 때문이다. 그 교육의 내용을 결정하는 권력 자체가 자의적으로 행사될 수 있다. 포퓰리즘에 대한 진짜 대응은 시민의 의식 교정이 아니라 포퓰리즘이 작동할 수 없는 제도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권력이 분산되어 있으면 단일한 포퓰리스트가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없다. 절차가 명문화되어 있으면 '인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우회하기 어렵다. 언론과 사법이 독립적이면 포퓰리스트의 서사가 검증 없이 유통되지 않는다. 공화론에서 말한 비지배 구조가 포퓰리즘의 가장 효과적인 해독제다.
다수의 감정이 언제나 정의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감정을 언제나 병리로 보는 것도 틀렸다. 포퓰리즘이 위험한 것은 감정을 동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감정을 독점하고 반대를 배제하며 제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진짜 싸움은 감정 대 이성의 싸움이 아니다. 감정이 다원성을 인정하는 제도 안에서 작동하느냐, 다원성을 파괴하는 서사의 연료가 되느냐의 싸움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제도는 감정의 적이 아니라 감정이 정치적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는 통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