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을 꺼내면 반응은 거의 정해져 있다. 나라 망한다, 일 안 한다, 퍼주기 포퓰리즘이다. 이 반응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들이 단순한 정책 비판이 아니라 특정한 인간관과 사회관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으면 받을 자격이 없다는 전제, 국가가 주는 것은 의존을 만든다는 전제, 돈은 노동을 통해서만 정당하게 얻을 수 있다는 전제. 기본소득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재정 논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유와 노동과 시민권에 대한 철학 논쟁이다.
이 글은 기본소득이 왜 좋은 제도인지를 주장한다. 그런데 그 주장은 재정 계산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자유가 무엇인지, 책임이 무엇인지, 공화국의 시민이 어떤 조건 위에 서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앞서 이 시리즈에서 반복해서 말해온 것들이다. 기본소득은 그 질문들의 논리적 귀결 중 하나다.
자유론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불러오자. 자유의 적은 실제로 행사된 강제만이 아니다. 언제든 자의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 지배 가능성 자체가 자유를 훼손한다. 필립 페팃이 비지배 개념으로 정밀하게 다듬은 이 통찰을 노동 관계에 적용해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생존이 노동에 전적으로 종속된 사람은 고용주의 자의적 판단에 노출되어 있다. 해고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임금이 삭감될 수 있다는 가능성,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면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가능성. 이것은 실제 강제가 발생하지 않아도 이미 지배의 구조 안에 있는 것이다. 온화한 고용주 아래서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는 노동자도, 그 고용주가 언제든 자의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 안에 있다면 자유롭지 않다. 생존 의존성은 지배 가능성의 가장 근본적인 원천이다.
기본소득은 이 구조에 개입한다. 생존의 최소 조건을 노동 계약 밖에서 보장함으로써, 노동 관계에서 발생하는 지배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약화시킨다. 이것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든다는 뜻이다.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것, 착취적인 계약을 거절할 수 있는 것, 더 나은 선택지를 탐색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기본소득이 자유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방식이다.
"일을 안 하게 만든다"는 비판은 이 지점을 오해한다. 그 비판이 전제하는 것은 인간이 강제되지 않으면 노동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생존 압박이 노동의 유일한 동력이라는 것이다. 실증적으로 이 전제는 지지받지 못한다.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에서 수령자의 고용률은 통제집단과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케냐의 GiveDirectly 실험에서는 오히려 장기적 생산성 향상이 관찰됐다. 물론 이 결과를 한국의 도시 노동 시장에 직접 적용할 수는 없다.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돈을 주면 일을 안 한다"는 단순한 주장이 보편적 진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더 중요한 것은 설령 일부가 노동 시간을 줄인다 해도 그것이 반드시 문제인가라는 질문이다. 착취적 노동에서 벗어나 다른 선택을 하는 것, 돌봄 노동에 더 시간을 쓰는 것, 창업을 시도하는 것이 왜 사회적 손실인가.
"나라 망한다"는 비판은 재정 논거인데, 이것은 설계의 문제와 원칙의 문제를 혼동한다. 설계 없이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방식의 기본소득이 현재의 재정 구조 안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소득 원칙이 틀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설계가 필요하다는 증거다. 청년층이나 플랫폼 노동자 같은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시범 도입, 기존 복지 프로그램의 중복 부분 통합을 통한 재원 확보, 밀턴 프리드먼이 제안한 네거티브 소득세 방식의 점진적 도입 등 재정적으로 실현 가능한 경로는 존재한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초생활보장처럼 현재 수급자에게 더 많은 급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기본소득으로 단순 대체하면 가장 취약한 집단이 손해를 보는 역설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것은 설계가 피해가야 할 함정이지, 기본소득 자체의 원칙적 결함이 아니다.
"부자에게도 주면 불공정하다"는 비판은 보편복지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다. 보편 지급의 실용적 의미는 두 가지다. 자산 조사와 수급 자격 심사에 드는 행정 비용을 제거하는 것. 그리고 복지 수급에 따르는 낙인을 없애는 것이다. 형평성은 지급 단계가 아니라 세금 구조에서 실현된다. 부유층에게 지급된 기본소득은 누진 과세를 통해 더 많이 환수되는 구조를 설계하면 된다. 이것은 기술적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다.
그러나 기본소득을 옹호하면서 정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기본소득은 만능 해결책이 아니다. 어떤 설계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난점들이 존재한다. 기본소득이 노동시장에서 임금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 인플레이션을 통해 실질 가치가 잠식될 가능성, 시민적 덕성과 연대감보다 개인적 소비로 귀결될 가능성이 그것들이다. 더 근본적으로 어떤 설계가 실패했을 때 이것이 설계의 문제인지 원칙의 문제인지를 사전에 판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 없이 모든 실패를 "설계가 나빴기 때문"으로 돌리면 이론이 비판으로부터 보호받는 반증 불가능한 구조가 된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이 지금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AI와 자동화의 확산은 노동 중심 복지 체계의 전제를 흔들고 있다. 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고용 관계가 모호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존 복지 체계는 정규 고용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어서 이 새로운 현실에 점점 맞지 않는다. 공화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제도는 현실의 변화에 맞게 재설계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은 그 재설계의 방향 중 하나다.
공화론에서 말한 선순환 구조를 기억한다면, 시민적 책임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려면 시민이 생존 압박으로부터 일정 부분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존을 위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사람에게 정치적 감시와 참여를 요구하는 것은 공허하다. 책임론에서 말한 것처럼, 시민이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공화국의 설계자이자 감시자로 기능하려면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은 그 조건의 제도적 표현이다.
좌우의 언어로 기본소득을 규정하는 것은 논점을 흐린다. 자유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생존 의존성이 만들어내는 지배 가능성을 문제로 봐야 한다. 공화국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시민이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물어야 한다. 책임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구조가 개인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 질문들에 진지하게 답하다 보면, 기본소득은 포퓰리즘이 아니라 자유와 공화국과 책임의 물질적 전제를 묻는 제도적 실험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설계 없는 현금 살포는 포퓰리즘이다. 그러나 설계 없이 쏟아지는 비판도 마찬가지로 철학이 없다. 기본소득을 진지하게 반대하고 싶다면, 생존 의존성이 만들어내는 지배 가능성을 어떤 다른 제도로 해소할 것인지를 먼저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