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다. 6시간 만에 해제됐고, 헌법재판소는 만장일치로 파면을 결정했다. 그런데 이 사태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계엄 선포 자체가 아니었다. 계엄이 선포될 수 있는 구조가 아무런 저항 없이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대통령 한 사람의 판단이 헌정 질서 전체를 흔들 수 있었고, 그것을 막을 제도적 장치는 사후적 탄핵 절차밖에 없었다. 사전에 작동하는 구조가 없었다는 것. 그게 이 사태가 드러낸 본질이다.
진보냐 보수냐의 논쟁은 많다. 그런데 그 논쟁들이 벌어지는 바닥. 즉 권력이 어떻게 제약되고 분산되며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논의는 놀라울 정도로 빈곤하다. 이념의 내용을 다투기 전에 이념이 작동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을 먼저 물어야 한다. 그 질문이 공화주의다.
공화주의는 단일한 이론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의 생명력을 시민의 정치적 역량과 제도적 긴장에서 찾았고, 루소는 공동선에 대한 시민의 헌신을 강조했으며, 매디슨은 인간의 파벌적 본성을 전제로 그것을 제도적으로 제어하는 설계를 구상했다. 한나 아렌트는 공적 영역에서의 행위와 판단 자체를 자유의 실현으로 봤다. 이것들은 서로 긴장하는 전통들이다. 그러나 이 다양한 계보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제의식이 있다. 권력은 반드시 제약되어야 하며, 그 제약은 특정 인물의 선의가 아니라 구조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필립 페팃은 이 문제의식을 비지배(non-domination) 개념으로 정밀하게 다듬었다. 자유의 적은 실제로 행사된 간섭만이 아니다. 언제든 자의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 권력의 존재 자체가 자유를 훼손한다. 온화한 주인 아래 있는 노예는 학대받지 않더라도 자유롭지 않다. 지배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한, 자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공화주의적 제도 설계의 목표는 이 지배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화주의가 안고 있는 긴장을 솔직하게 다뤄야 한다. 비지배 구조를 실현하려면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 권력을 분산시키고, 절차를 명문화하며, 감시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모두 제도적 강제를 수반한다. 이것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간섭이다. 페팃의 답은 공화주의적 제도를 통한 강제는 자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적으로 정당화된 규칙에 따른 강제는 특정 개인의 임의적 의지가 아니라는 논리다. 이 답이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공적으로 정당화된 규칙을 만드는 권력 자체가 자의적으로 행사될 수 있다는 문제가 남는다. 공화주의는 이 문제를 민주적 숙의와 시민 참여로 대응하려 하지만, 그것이 충분한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또한 공화주의가 시민적 덕성을 강조할 때 생기는 위험도 있다. 공동선에 대한 헌신과 정치적 참여를 시민의 의무로 요구하는 것이 자칫 특정 계층의 정치 문화를 표준으로 강제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공화주의가 소수자의 자유를 억압하는 논리로 전용된 역사적 사례도 존재한다. 이 긴장을 인식하지 않으면 공화주의는 또 다른 형태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이 한계들을 인정한 위에서, 한국 정치를 공화주의적 관점으로 진단하면 무엇이 보이는가.
한국의 대통령제는 구조적으로 권력 집중을 허용한다. 행정부 수반이자 군 통수권자이며 사면권과 긴급명령권까지 보유한 대통령의 권한은 어느 선진 민주주의와 비교해도 과도하다. 계엄 선포가 가능했던 것은 윤석열 개인의 일탈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일탈을 사전에 막을 제도적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적 언어로 말하면, 권한과 권력의 분리가 실패했다. 권한은 법적 정당성이고 권력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힘인데, 한국 정치는 이 둘을 혼동한다. 지지율이 높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논리, 선거에서 이겼으니 모든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가 그 혼동의 산물이다.
진보와 보수 모두 이 구조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보수는 헌정 질서를 수호한다고 말하면서 계엄이라는 헌정 파괴를 방어했고, 진보는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행정부 권한의 집중을 오히려 활용했다. 둘 다 공화주의적 제도 설계에는 무관심했다. 이것이 한국 정치의 구조적 병리다. 이념의 내용을 다투기 전에, 이념이 작동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 자체가 취약하다.
그렇다면 공화주의적 설계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대통령의 권한 범위를 더 좁고 명확하게 법제화하는 것, 헌법재판소와 선거관리위원회의 실질적 독립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 탄핵과 계엄 같은 헌정적 행위에 더 엄격한 절차적 조건을 명문화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이원집정부제 논의도 이 맥락에서 검토할 수 있다. 다만 이원집정부제는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권력 충돌. 즉 동거정부 문제를 내장하고 있어서 도입 자체가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프랑스 제5공화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왔고 어떤 한계를 드러냈는지를 보면 제도 이식의 단순함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시민 참여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의무투표제나 시민배심단 같은 제도는 참여를 강제하는 것이 오히려 무관심 투표와 대표성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반론을 안고 있다. 공화주의가 요구하는 시민적 덕성은 제도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참여가 실질적 의미를 갖는 구조가 만들어질 때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에 더 가깝다. 감시와 참여가 제도화되려면 그것이 실제로 권력을 제약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경험이 먼저 쌓여야 한다.
여기서 공화주의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남는다. 선순환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시민의 책임이 감시 제도를 만들고, 감시 제도가 권력을 제한하며, 권력 제한이 절차를 지키게 하고, 절차가 자유를 유지하며, 자유가 다시 시민의 책임을 강화한다는 구조는 논리적으로 일관된다. 그러나 이 순환이 시작되는 최초의 계기는 어디서 오는가. 시민적 덕성이 없는 상태에서 제도를 만들 정치적 동력은 무엇인가. 공화주의는 이 질문에 완전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제도가 먼저냐, 시민이 먼저냐의 문제는 공화주의 이론의 오래된 난점이다.
그럼에도 공화주의가 지금 한국 정치에서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이념의 내용을 다투는 것보다 이념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설계하는 것이 더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보의 평등도, 보수의 질서도, 제도적 제약 없는 권력 앞에서는 슬로건에 불과하다. 공화주의는 그 슬로건들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구조를 묻는다. 그 질문 자체가 지금 한국 정치에서 가장 부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