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by Edward Alistair Langford

자유롭다는 느낌과 자유롭다는 사실은 다르다.


이것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다음 상황을 생각해보자. 당신이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상사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업무에 간섭하지 않고,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으며, 당신이 하는 일에 토를 달지 않는다. 겉으로 보면 자유롭다. 그런데 그 상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당신을 해고할 수 있고, 인사권을 쥐고 있으며, 그 권한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제도적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 간섭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은 정말로 자유로운가.


정치철학은 오래전부터 이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자유를 "타인의 간섭이 없는 상태"로 정의하는 전통을 소극적 자유라고 부른다. 이사야 벌린이 1958년 강연 「두 가지 자유 개념」에서 정밀하게 다듬은 개념이다. 벌린의 소극적 자유는 단순한 방임 상태가 아니라 타인의 의도적 강제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의미하며, 그 자체로 중요한 정치적 가치를 갖는다. 국가가 개인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 그게 소극적 자유의 핵심 기능이다. 이것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폭력은 "더 나은 자유를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소극적 자유를 짓밟은 국가들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극적 자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위의 직장 예시가 바로 그 지점을 드러낸다. 상사가 실제로 간섭하지 않는 한, 소극적 자유의 언어로는 그 관계에서 뭔가 잘못됐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강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직관적으로 그 상황이 온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느낌은 틀리지 않다.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관계의 구조를 바꿔놓기 때문이다. 당신은 상사의 심기를 살피게 되고, 말을 고르게 되며, 불필요한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실제 강제가 없어도 지배 가능성이 행동을 제약한다.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이 필립 페팃의 비지배(non-domination) 개념이다. 페팃은 1997년 『공화주의(Republicanism)』에서 자유의 핵심을 간섭의 부재가 아니라 자의적 지배 가능성의 부재로 재정의했다. 여기서 '자의적'이라는 수식어가 중요하다. 페팃이 말하는 지배는 모든 종류의 권력 행사가 아니다. 피지배자의 이익과 판단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 권력. 그것이 지배다. 따라서 비지배는 권력 자체의 소멸이 아니라 권력이 자의적으로 행사될 수 없도록 구조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별이 왜 중요한가. 소극적 자유는 실제 간섭이 발생했을 때만 자유의 침해를 포착할 수 있다. 비지배 개념은 간섭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자의적 지배가 가능한 구조 자체를 자유의 문제로 끌어안는다. 노예가 온화한 주인을 만나 실제로 학대받지 않는다 해도 자유롭지 않은 것과 같은 논리다. 지배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한, 자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비지배론이 안고 있는 긴장을 솔직하게 짚어야 한다. 비지배 구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강제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법률을 명확히 하고, 권력을 분산시키며, 감시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모두 국가의 개입을 요구한다. 이것은 소극적 자유의 관점에서 보면 간섭이다. 그렇다면 비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 개입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페팃의 답은 이렇다. 공화주의적 제도를 통한 간섭은 자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법의 지배 아래 이루어지는 강제는 특정 개인의 임의적 의지가 아니라 공적으로 정당화된 규칙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답이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공적으로 정당화된 규칙을 만드는 권력 자체가 자의적으로 행사될 수 있다는 문제가 남는다. 비지배론은 이 문제를 민주적 숙의와 시민 참여로 대응하려 하지만, 그 대응이 충분한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지배 개념이 제도 설계의 언어로 갖는 힘은 뚜렷하다. 법률이 명확해야 하는 이유는 자의적 집행을 막기 위해서다. 권력이 분산되어야 하는 이유는 특정 세력이 구조적 지배력을 독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사법 독립이 요구되는 이유는 판결이 권력자의 의지가 아니라 공적 기준에 따라 내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비지배 개념 없이도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이론에서 정당화되지만, 비지배의 언어는 이 원칙들이 왜 단순한 절차적 요건이 아니라 자유의 실질적 조건인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자유를 감정의 문제로 환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불편하지 않다"는 개인의 경험은 자유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지배 가능성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것을 자유라고 느끼기도 한다. 자유는 주관적 안락함이 아니라 자의적 지배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다. 그리고 그 상태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제도가 설계되고, 권력이 제어되며, 그 설계가 지속적으로 감시받을 때만 유지된다.


자유는 구조의 문제다. 그리고 구조는 설계의 문제다. 이 명제가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오늘 당신이 아무 말 없이 참은 것이 정말 자발적인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가진 권한이 그 침묵을 만들어낸 것인지를 한 번쯤 물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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