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론

by Edward Alistair Langford

중도라는 말처럼 듣기 좋은 정치적 자기소개가 없다. 좌도 우도 아니라는 선언은 극단을 경계하는 성숙한 판단처럼 들리고, 양쪽을 모두 비판한다는 태도는 편협하지 않은 지성의 표식처럼 읽힌다. 그래서 정치 혐오가 깊어질수록 중도를 자처하는 사람은 늘어난다. 한국갤럽의 정기 조사에서 이념 성향을 "중도"라고 응답하는 비율은 꾸준히 40퍼센트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숫자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국 유권자의 절반 가까이가 일관된 제3의 철학을 갖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말해주는가.


중도를 이념적으로 진지하게 다루려면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짚어야 한다. 정치학에서 중도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다. 앤서니 다운스의 중위투표자 이론에서 중도는 유권자 선호 분포의 중앙값이고, 아렌트 레이파르트의 합의 민주주의 모델에서 중도는 연립과 타협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기반이며, 블레어와 슈뢰더가 시도했던 제3의 길에서 중도는 좌우를 종합하는 독자적 이념 축이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중도를 자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중도는 이 중 어느 것과도 잘 맞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중도는 이념적 포지션이 아니라 이념으로부터의 거리두기다.


이 지점이 핵심이다. 스펙트럼의 중간값을 택하면 중도라는 생각은 직관적으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허상이다. 좌우 스펙트럼 자체가 고정된 좌표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사안에 따라, 사회에 따라 무엇이 좌이고 무엇이 우인지는 계속 재정의된다. 1970년대 서유럽에서 케인스주의적 복지 확대는 중도 좌파의 언어였지만, 오늘날 일부 보수 정당도 그것을 수용한다. 중간값이란 기준점이 움직이는 두 극단 사이의 중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더 실질적인 문제는 자칭 중도들의 실제 논리 구조에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사회 문제에서는 좌파적 감수성을 보이고 경제 문제에서는 우파적 직관을 따른다. 이것이 반드시 철학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자유주의나 자유지상주의처럼 이 조합을 일관된 원칙 위에서 정당화하는 이념적 전통이 실재한다. 문제는 그 원칙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할 때다. "나는 각 사안마다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는 말은 판단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을 피해가는 방식이다. 합리성 자체도 하나의 철학적 전제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양쪽을 모두 비판한다는 태도도 실제로는 균형이 아닌 경우가 많다. 두 진영을 동등하게 문제 삼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쪽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다른 쪽에 대해서는 뭉뚱그린다면 그건 균형이 아니다. 물론 이것이 반드시 의도적인 면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느 쪽이 현재 더 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판단이 비판의 밀도 차이를 만들 수도 있고, 어느 쪽의 논리에 더 익숙하기 때문에 더 정교하게 비판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비대칭이 판단의 결과인지, 판단을 회피한 결과인지는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비대칭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균형이 아니라 선택적 편의다.


진짜 문제는 정치적 냉소와 기권을 중도의 언어로 포장할 때 발생한다. 정치가 피곤하다는 감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제도에 대한 합리적 불신, 대표성 실패에 대한 반응, 자신의 철학을 대변할 정당이 없다는 현실적 판단. 이것들은 무지가 아니라 정치 체계의 실패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피로감과 냉소를 "나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자기 규정으로 전환하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상식이 무엇인지, 합리성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그 언어를 정치적 우월감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지가 아니라 자기 인식의 실패다.


그렇다면 중도가 이념적으로 성립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좌우 양쪽에 대한 비판 자체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판 다음에는 자신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 그 기준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리고 그 기준으로 구체적인 사안을 어떻게 판단하는지가 따라와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중도는 이념이 아니라 이념으로부터의 도피처가 된다. 실제로 일관된 중도적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은 양쪽 진영 모두로부터 공격받는 고립된 자리다. 그 자리를 버티려면 감정이 아니라 논리가 필요하고, 냉소가 아니라 책임이 필요하다.


한국의 자칭 중도 다수가 그 자리에 있는가. 대체로 그렇지 않다.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것은 중도의 자리가 아니라 중도라는 언어다. 그 언어가 제공하는 것은 판단의 부담 없이 지성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자기 포장이다. 이것을 냉소적으로 비판하기는 쉽다. 그러나 더 정확한 진단은 이것이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실제로는 특정한 가치 판단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이념의 언어로 정식화하지 않은 채 "상식"이나 "합리"라는 중립적 언어 아래 숨기고 있다. 숨겨진 이념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거나, 의식하면서도 드러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중도가 아니다.


중도는 위치가 아니다. 좌우 어느 쪽의 논리도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을 전제로, 더 나은 기준을 스스로 구성하고 그 기준으로 판단하며 그 판단에 책임을 지는 태도다. 그 태도는 드물다. 그리고 그것이 드물기 때문에, 중도라는 말은 그 드문 것의 이름이 아니라 흔한 회피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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