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론

by Edward Alistair Langford

진보라는 말은 한국에서 이상하게 소비된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 스스로를 진보라 불렀고, 검찰 개혁을 외치던 지지자들도 진보였으며, SNS에서 보수를 향해 도덕적 규탄을 퍼붓는 계정들도 진보를 자처했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분모가 무엇인지 물으면 대답이 흐릿해진다. 변화를 원한다는 것? 약자의 편이라는 것? 그것만으로는 이념이 되지 않는다. 감정은 이념의 연료가 될 수 있지만, 연료 자체가 이념은 아니다.


진보주의를 사상적으로 재구성하면 그 핵심은 두 개의 명제로 압축된다. 첫째. 현재의 사회 질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설계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 둘째. 그 변화는 자의적이거나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을 향해 설계되어야 한다. 이 두 명제가 동시에 성립할 때 비로소 진보는 이념이 된다. 첫 번째 명제만 있으면 혁명주의가 되고, 두 번째 명제만 있으면 개량적 보수주의와 구별이 사라진다. 진보의 정체성은 이 두 명제의 긴장 속에 있다.


이 긴장을 버텨낸 사례들은 역사 속에 실재한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불평등이 왜 문제인지를 감정이 아닌 논리로 증명했다. 그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사고 실험을 통해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합리적 인간이라면 어떤 분배 원칙을 선택할 것인지를 물었다. 결론은 최소 수혜자의 처지를 최대화하는 구조였다. 이것은 슬로건이 아니라 설계였다. 비슷하게 20세기 초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혁명 대신 입법과 행정을 통한 점진적 변화를 선택했고, 복지국가의 제도적 뼈대를 실제로 놓았다. 비판 뒤에 설계가 있었고, 설계 뒤에 실행이 있었다.


이 기준에서 한국 진보를 들여다보면 어디서부터 문제인지가 보인다.


비판은 넘친다. 재벌 체제가 문제라고, 불평등이 심각하다고, 검찰 권력이 비대하다고, 부동산 구조가 중산층을 파괴한다고. 이 진단들 중 상당수는 사실이다. 그런데 비판 다음에 나와야 할 것. 즉 그것을 어떤 구조로 재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언어가 빈곤하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제는 시행됐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시장 이중구조(정규직 대 비정규직, 대기업 대 중소기업)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 설계로 이어지지 않았다. 최저임금이 오르는 동안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비용 부담 문제는 정교하게 다뤄지지 않았고, 결국 일부 취약 고용의 축소라는 역설을 낳았다. 정책이 없었던 게 아니라, 정책이 전체 구조 속에서 어떻게 작동할지를 설계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비판의 밀도는 높았지만 설계의 밀도는 낮았다.


정의감의 문제는 더 심층적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은 진보의 필수 자원이다. 문제는 그 감수성이 정치적 언어가 아니라 도덕적 언어로 고착될 때 발생한다. "틀렸다"는 판단과 "나쁘다"는 판단은 다르다. 전자는 논증의 영역이고, 후자는 감정의 영역이다. 한국 진보 담론에서 반복되는 패턴은 후자다. 상대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분해하는 대신, 그 주장을 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것은 진보적 정의감이 아니라 도덕적 우월주의다. 그리고 도덕적 우월주의는 상대를 설득하지 못한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토론은 끝나고 진영전이 시작된다.


더 근본적인 결함은 보편성의 부재다. 진보주의의 철학적 전제는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적 개선이다. 롤스가 최소 수혜자를 기준으로 삼은 이유도 그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원칙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 진보 정치는 점점 그 보편성을 잃어가고 있다. 지지층의 정서적 결속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설득해야 할 중간층과 반대편을 조롱하거나 악마화한다. 공동체를 재구성해야 할 이념이 공동체를 두 쪽으로 쪼개는 도구가 되고 있다. 이것은 진보의 퇴행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한국 진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분명해야 한다. 민주당 주류 정치인, 정의당 활동가, 시민사회 연구자, SNS 지지자 군중은 각각 다른 층위에 있다. 구체적인 입법안을 설계하고 발의하는 정치인과, 트위터에서 도덕적 규탄을 일삼는 일반 지지자를 같은 기준으로 묶어 비판하면 분석이 흐려진다. 비판이 정확하려면 대상이 정확해야 한다. "한국 진보"라는 단일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 정치 세력의 설계 능력 부재를 비판하려면, 어떤 정책이 어떤 이유에서 구조적으로 실패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짚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진보 정치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구조적 결함은 뚜렷하다. 비판의 언어는 과잉이고 설계의 언어는 빈곤하며, 도덕적 열기는 높지만 제도적 상상력은 낮다. 진보가 진보답기 위해 갖춰야 할 것은 더 강한 분노가 아니라 더 정교한 설계다. 불평등이 왜 나쁜지를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어떤 조세 구조와 사회안전망과 노동 제도를 통해 그것을 실질적으로 완화할 것인지를 말하는 언어다. 감동을 주는 서사가 아니라 집행 가능한 행정의 언어다.


진보라는 이름을 쓰고 싶다면 그 이름에 걸맞은 설계 능력을 갖춰야 한다. 설계 없는 진보는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열광주의이거나, 더 나쁜 경우 진영 소비를 위한 감정 정치다. 변화를 원한다는 감정과 변화를 설계한다는 능력 사이의 거리는 진보주의가 극복해야 할 가장 오래된 과제이면서 동시에 가장 자주 실패하는 지점이다. 한국 진보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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