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공화주의가 전체주의나 파시즘과 같은 것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처음엔 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국 온라인 담론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혼동이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특히 기본소득론이나 공화주의적 자유 개념이 진보적 어젠다로 소비되기 시작하면서 보수 측에서는 이를 국가 개입주의의 일종으로 환원하고, 급진 좌파 측에서는 반대로 시민적 덕성 담론이 공동체주의적 억압을 정당화한다는 식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이 혼란의 구조를 제대로 짚으려면 세 개념 각각의 이론적 계보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신공화주의의 현대적 형태를 체계적으로 정초한 사람은 필립 페팃이다. 그의 핵심 주장은 자유를 단순한 간섭의 부재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홉스-벤담 계열의 자유주의 전통에서 자유란 타인의 실제적인 간섭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페팃은 이것이 지배 없는 자유. 즉 비지배(non-domination)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자비로운 주인 아래 있는 노예는 실제로 채찍질 당하지 않는 한 벤담식 기준으로는 자유롭다. 하지만 그 노예는 주인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으며, 주인이 마음만 바꾸면 언제든 지배받을 수 있는 구조 속에 있다. 신공화주의는 바로 이 구조적 종속 가능성 자체를 자유의 침해로 본다. 따라서 신공화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제도적 장치. 즉 개인이 타인의 자의적 의지에 종속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법과 제도의 수립이다. 여기서 국가의 역할이 부각되기 때문에 국가 개입을 혐오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이것을 전체주의와 동류로 몰아가는 계기가 생긴다.
그러나 이 논리 연결은 범주 오류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자율 영역 자체를 부정하고 정치권력이 사회의 모든 영역, 경제, 문화, 종교, 사생활, 사유까지 총괄 지배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한나 아렌트가 분석한 대로 전체주의는 단순한 독재나 권위주의와도 구별된다. 독재는 정치 영역에서 반대를 억압하지만 사적 영역의 존재 자체는 인정한다. 반면 전체주의는 그 경계선 자체를 지운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나 나치 독일에서 개인은 당과 운동에 완전히 용해되어야 하는 존재였고, 그 용해를 거부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전체주의의 핵심적 구조적 특징은 전일적 이데올로기, 단일 당, 테러에 의한 지배, 경제와 정보의 독점, 그리고 아렌트가 강조한 고독과 고립의 제도화다. 이것은 신공화주의가 말하는 비지배적 자유의 제도화와는 방향이 정반대다. 신공화주의는 국가가 시민의 삶을 총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시민이 국가를 포함한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자의적 지배를 받지 않도록 제도적 견제와 균형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파시즘은 전체주의와 부분적으로 겹치지만 별개의 개념적 궤도를 갖는다. 파시즘은 국민 또는 민족의 유기적 통일성을 절대 가치로 내세우며, 계급 갈등을 부정하고 민족적 위기의식을 조직화하여 권위주의적 지도자 아래 사회를 통합하려는 운동이자 체제다. 에코의 우르파시즘 분석이나 스탠리 페인의 분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징들. 즉 반자유주의, 반마르크스주의, 행동주의와 의지의 숭배, 민족-국가의 신화화, 폭력의 정치적 미학화 등은 신공화주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공화주의의 계보는 마키아벨리, 로마 공화정의 전통, 17세기 영국 공화주의자들(해링턴 등), 그리고 계몽주의 공화주의로 이어지는 고전적 자유의 계보다. 파시즘이 민족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종속을 강제한다면, 신공화주의는 개인이 어떤 집단적 의지에도 자의적으로 종속되지 않는 것을 자유의 본질로 정의한다. 두 사상의 근본 지향은 서로 대극에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 사회에서 이 혼동이 발생하는가. 몇 가지 구조적 이유를 짚을 수 있다. 첫째. 한국의 이념 지형은 냉전 반공 체제의 유산으로 인해 국가 개입과 시장 규제를 좌파, 좌파를 전체주의의 예비 단계로 연결하는 반사적 사고가 강하게 남아 있다. 이 구도 안에서는 신공화주의가 복지 확대나 기본소득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쓰이는 순간, 자동으로 전체주의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다. 둘째. 신공화주의를 실제로 학술적 텍스트로 접한 사람보다 그것의 정치적 수사 버전만 소비한 사람이 훨씬 많다는 문제가 있다. 페팃의 원전이나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비판을 읽지 않고 공화주의라는 단어의 표면적 어감만 가지고 논쟁하면 오해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셋째. 공화주의는 공동체적 덕성을 강조하는 시민적 공화주의(civic republicanism) 계열도 있어서, 이쪽을 염두에 두면 공동선을 위한 개인의 규율이라는 이미지가 쉽게 전체주의와 연결되는 착시가 생긴다. 그러나 페팃류의 신공화주의는 시민적 공화주의와도 구별되며, 덕성보다는 제도적 구조에 방점을 찍는다.
결론적으로 세 개념의 차이는 결코 미묘한 정도 차이가 아니다. 전체주의는 개인을 권력에 용해시키고, 파시즘은 민족-국가라는 유기체에 개인을 귀속시키며, 신공화주의는 개인이 어떤 권력에도 자의적으로 지배받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국가 역할을 긍정한다는 표면적 유사성 하나로 이 세 가지를 동치시키는 것은 모두가 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이유로 F1 레이서와 대리운전 기사를 같은 범주로 묶는 것만큼 조악한 논리다. 개념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정치 담론은 결국 자기 진영을 향한 무기로만 기능하고, 실질적인 사회적 논의를 가로막는다. 그것이야말로 이 혼동을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