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낭만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나는 종종 건축의 시작에 대해 생각한다.
건축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설계일까, 구조일까, 아니면 법일까.
여러 답이 있겠지만, 우리가 처음 건축에 발을 들일 때 배우는 것은 의외로 그것들이 아니다.
오늘은 브런치승인이 아닌 나의 첫 글을 시작하려 한다.
처음이 주는 망설임 그리고 긴장... 그런데 돌이켜 보면 단지 나 혼자만의 떨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건축의 시작은 건축학개론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낭만이라는 오해, 그리고 전람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그렇다. 영화 건축학개론.
많은 사람은 이 영화를 떠올리면 비 오는 날의 첫사랑, 오래된 기억, 그리고 조금은 아련한 감정을 떠올린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흐르고, CD 플레이어의 이어폰 한쪽을 나누어 끼던 그 시절의 서정적인 풍경들.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답답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공통적이다.
그들에게 건축학개론은 낭만, 그리고 내겐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전공자가 처음 마주한 건축학개론은 어땠을까.
영화 속 한 장면 대신, 조금은 서늘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저 모두가 아닌 나와 몇몇의 이야기겠지?
내가 대학 1학년,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푸근함과 날카로움 사이의 교수
그날 강의실은 묘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들, 아직 서로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는 건축이라는 단어가 주는 막연한 기대감 하나만을 들고 앉아 있었다.
영화에서는 배우 김의성이 위트있고 센스 있는 모습이지만.. 현실도 그러할까?
그때 문이 열리고 한 교수가 들어왔다. 생각보다 젊었지만 머리칼은 이미 희끗해진 건지 아니면 세월을 앞서간 건지 숱이 적었다. 인상은 푸근해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어딘가 서늘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 중간 어디쯤의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나도 오늘 첫 부임이고, 여러분도 첫 수업이네요.
우린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인 것 같습니다.”
짧은 인사였다. 그리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수업을 시작해볼까요. 교재 1페이지를 펴봅시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당시엔 온라인 서점이란건 없던 시대였고, 학교 서점에서 일괄적으로 들어오는 교재를 구매하곤 했는데, 입고 상황에 따라 책이 없는 경우가 흔했다.
“혹시 교재 안 가져온 사람 있습니까?”
전체 40명 남짓한 정원 중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손을 들었다.
교수는 잠시 우리를 바라보다가 무심하게 말했다.
“교재가 들어왔는지 확인해야겠네요. 손든 사람들 이름 좀 말해보세요. 인원 파악을 해야 서점에 요청을 하니까.”
누군가에게 건축은 침묵으로 시작된다
강의실 여기저기서 순진한 대답들이 튀어나왔다.
“네, ○○○입니다.”
“○○○입니다.”
“○○○입니다.”
차례로 불린 이름이 열여섯 명에 달했다. 40명 중 16명. 강의실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그리고 그다음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떨어졌다.
“네, 알겠습니다. 여러들은 F입니다. 앞으로 수업 들어올 필요 없으니까 지금 나가세요.”
순간 강의실이 얼어붙었다. 누군가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고, 누군가는 이것이 고도의 농담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판단하기 위해 옆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교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출석부를 넘기며 쐐기를 박았다.
“나머지는 책 펴고, 출석 부르겠습니다.”
그날이 내가 처음 들은 건축학개론이었다. 우리가 상상했던 건축은 사람과 공간, 이야기와 감성이 어우러진 어떤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첫 수업은 그 어떤 설명도, 철학도 없이 시작되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그냥 잘려 나간다. 그 비정한 논리 앞에 그 어떤 수사학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나에게 건축의 시작은 화려한 이론이 아니라, 설명이 생략된 거대한 침묵이었다.
처량한 뒷모습들의 오버랩
나는 그 장면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건축학개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영화 속 첫사랑의 장면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대신 그날 그 강의실 한가운데서 멍하니 서 있던 동기들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자신이 왜 나가야 하는지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쫓겨나듯 서 있던 열여섯 명의 얼굴들. 그 처량한 뒷모습들을 보고 있자면, 영화 속 남주인이 느꼈을 그 막막하고 쓸쓸한 정서가 묘하게 겹쳐진다. 영화에선 사랑이 끝났을 때 그런 뒷모습이 남지만, 우리에겐 건축의 시작점에서 그런 뒷모습이 남았다.
그래서 누군가 건축의 시작을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건축은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누군가에게 건축은 아무 말 없이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그 시작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차갑고 단호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쓰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브런치.. 어디로 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