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열림원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는 가물가물한데, 이어령 교수님의 책을 집에 쌓아두고 읽은 적이 있다. 엄마가 출판사의 마케팅에 넘어가(?) 사 오신 것 같은 책이었는데, 돌아보니 무려 이어령 교수님의 책이었던 것이다.
10권 남짓한 책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문구, ‘물 쓰듯 해서는 안 되는 물’. 내가 습관적으로 물을 아끼게 된 건, 분명 이 책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심심해서 읽었던 책의 한 문장이 내 머릿속에 오래 남아,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기억이 나는, 나의 무의식이자 ‘가치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한 번 만들어진 가치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사람의 뇌는 자신의 첫 경험에 가중치를 크게 둔다.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기에 편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정보들이 입력되는 세상이기에, 더더욱 우리 뇌는 정보들을 단순화하고 빠르게 판단하고자 한다. 한 번 입력된 정보가 수정되려면, 초기 정보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들이 쌓이고 쌓여야 한다.
오랜 시간 마음으로나 머리로나 인정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이제는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일. 그러한 일에는 늘 전조현상이 있다. 나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어-라고 말해주는 일들이 하나, 둘 벌어지고, 차곡차곡 쌓여간다. 사랑과 우정이 그렇고, 배신이 그렇다. 그리고 신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그렇다. 정말인가? 진짜 맞네! 의 연속. 그리고 다시 불신과 돌아옴의 반복.
이어령 교수님의 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는 아마도 그러한 흔적인 것 같다. 믿어지지 않지만, 아직 납득할 수 없지만, 어쩌면 맞을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의 흔적. 학자로서 성경을 수십 번 읽어봤지만 믿어지지 않던 이야기가 믿어지기까지. 그렇게 생각이 바뀌게 되고, 그러한 시간들과 이야기를 담담하게 적은 책이 <지성에서 영성으로>이다.
크리스천이 되기 전과 후, 저자의 삶은 180도 달라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글을 쓰고, 시를 쓴다. 글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글을 통해 지식을 전하고, 글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신을 믿게 되기까지의 과정마저도 글로, 책으로 펴냈으니 말이다.
정말 그렇다. 사람들은 신을 믿으면 부자가 될 것 같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고,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신이 주는 최고의 것은 돈도, 명예도, 건강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허락된다 할지라도,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목적이 달라지는 것이다. 똑같이 달려가도, 똑같이 자동차를 타고 가도, 어떻게 가느냐와 상관 없이 동쪽으로 가는 사람과 서쪽으로 가는 사람은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게 되는 것처럼.
한밤중에 글을 쓰다가 외로우면 창문을 열고 밖을 봅니다. 한시, 두시가 넘었는데 무엇 때문인지 창문에 불이 꺼지지 않은 집들이 몇 있어요. 누가 아픈지, 시험공부를 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 슬퍼서 그러는지, 남들은 다 자고 있는데 몇몇 집들이 불이 켜져 있어요. 저쪽 집에서도 올려다보면 내 집 창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볼 수 있겠지요.
한밤중에 아프고 슬프고 아직도 방황하는 사람들이 불을 끄지 못한 채 있어요. 그것이 나의 제단입니다. 나의 제단은 교회가 아닙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불 켜져 있는 한밤중의 창문들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듭니다. 그때의 나는, 나만을 위해 기도했던 지난날과 달라서, “주님, 이 밤중에 잠들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 불 끄고 편한 잠을 자지 못하는 그들의 영혼을 편히 쉬게 하소서.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나 부족한 대로 또 사람의 아들로 조금씩 쌓아가며 어제보다는 나은 삶을 살게 하소서”라고 빌어요. (267-2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