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딸아이가 말했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외할아버지 집에 놀러 갔을 때 엄마는 할머니랑 어디 나가고 아이는 할아버지랑 같이 집에 있게 됐다. 할아버지가 컴퓨터로 잠깐 바둑을 둘 때 아이는 할아버지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봤는데 그때 본 무서운 영상이 계속 생각이 난다는 거였다.
며칠 전에도 자기 전에 그때 봤던 무서운 게 생각나서 잠을 못 자겠다고 하더니 어제도 양치를 하고서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또 든다고 울먹였다.
"이든아,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종이 위에 무서운 거를 쓴 다음에 와구와구와구 구겨서 던져버리는 거야"
아이는 '와구와구와구'라는 표현이 재밌었는지 폭소를 터뜨리며 깔깔깔 웃었다.
예전에 한비야씨가 쓴 에세이에서 이런 걸 봤었다. 걱정이 많아지면 그걸 큰 종이 위에다 다 써본다고. 그러면 생각보다 걱정이 작아진다고. 나도 모르게 정리가 된다고.
그래서 나도 마음이 답답하고 막막하면 무지 다이어리 한 면에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 감정이나 당면한 문젯거리를 써보곤 한다.
아이가 하도 무서운 영상을 본 생각이 수시로 떠오른다고 얘기하길래 무심코 종이에 무서운 걸 쓰고 구겨서 던져보자고 했는데 아이는 이미 내가 양치를 하는 동안 종이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아빠, 나 다 적어서 만들었어. 우리 각자 적은 거 쓰레기통에 던지기 놀이하자"
그렇게 아이와 쓰레기통에 누가 세 번을 먼저 넣는지 시합을 하며 놀았다.
밤 10시즈음 아이 엄마가 아이를 재우고 난 뒤 서재로 오더니 꼬깃꼬깃한 종이를 하나 펼쳐 보였다. 아까 아이가 쓴 걱정거리였다.
쓰레기통에서 아이가 구겨 던진 종이를 찾아보는 엄마의 치밀함..
'나쁜 영상을 봤는데 용서해 주세요. 간절히'
'아이가 나름대로 많이 힘들어했구나'라는 생각에 짠하기도 하고 웃음이 조금 나기도 했다.
아까 시합을 하면서 몇 번이나 걱정을 구겨 만든 종이를 던졌으니 아이의 마음은 좀 가벼워졌으려나.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점차 잊히겠지만 아이의 마음을 무섭게 한 그 영상이 걱정 던지기로 좀 더 빨리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으면 좋겠다.
나도 아이 때문에 하긴 했지만 쓰레기통에 반복해서 걱정 종이를 던지니 확실히 마음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이면지를 잘 좀 모아 놓아야지. 걱정되고 스트레스를 받고 답답한 게 있으면 이면지 위에 냅다 휘갈겨 쓴 다음, 휴지통으로 시원하게 던져 버리게.
아이에게도 나중에 한 번 물어봐야겠다. 효과가 좀 있었는지를. 머릿속 무서운 영상의 기억이 좀 사라졌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