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 '아, 이런 분들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던 분들. 예상치 못한 배려와 작은 선물을 받은 날은 마음에 오래 여운이 남아 고된 하루를 버틸 힘이 되었다.
* '아아'를 건네고 홀연히 사라지신
아직은 더위가 느껴지던 10월의 어느 날, 인쇄소들이 모여 있는 거리의 어느 카페에 배송될 물품이 있었다.
카페 근처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 어플로 위치를 확인한 다음 물건을 카페 문 앞에 두고 왔다.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배송이라 이런 카페 같은 곳은 대부분 문 앞에 물건을 두고 온다.
다시 탑차로 돌아가서 다음에 갈 곳을 확인하는데 누군가 차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를 빼 달라는 건가?' 하고 창문을 내리는데 앞치마를 한 50대 여자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주시고는 후다닥 걸어가셨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방금 배송한 카페 주인 분이라는 걸 알았다.
이날 마셨던 '아아'의 쌉싸롬한 맛을 아직도 내 혀의 미뢰는 기억하고 있다. 시원하고도 마음을 따듯하게 했던 카페 주인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까지 다 내어준 후에도 커피가 담겼던 플라스틱 컵과 빨대는 이날 배송이 끝날 때까지 운전석 옆에서 함께하며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 밥 한 공기의 온정
배송 에어리어가 굉장히 넓었던 날이었다. 오후 2시가 될 때까지 전체 물량의 3분의 1밖에 배송을 못했던 날.
착잡하고 초조했으나 밥이라도 제대로 먹자 하고 근처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돼지국밥을 시켜서 뜨거운 국물과 함께 밥 한 공기를 거의 비워가는데 글쎄 아주머님이 밥 한 공기를 조용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시는 게 아닌가.
내가 머뭇머뭇 하니 아주머님도 살짝 머뭇머뭇 하시면서 "젊은데 일하느라 고생이 많아요"라고 하시면서 김치와 깍두기도 더 가져다주셨다.
사실 택배일을 하며 점심식사를 할 땐 너무 배부르게 먹으면 안 된다. 몸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건을 들고 빨리 이동하기도 힘이 들고 식곤증 때문에 피로감이 많이 느껴지기 때문에 식사량을 잘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전에 한 번 점심을 배 터지게 먹었다가 오후에 배송 속도를 못 내서 고생하고 얻은 팁.
그렇지만 아주머님의 마음이 참 감사했다. 어차피 오늘 물량을 소화하려면 늦은 저녁이 되겠단 생각에 남은 국물과 고기와 반찬을 배가 부르도록 든든하게 먹었다.
예상대로 이날은 저녁 8시가 되도록 다 못 끝냈고 특히 맨 마지막에 간 자동차 전시장에서 한참을 헤매서 무진장 고생한 날이었다.
그럼에도 이날 밤 집에 들어갈 때까지 배가 고프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는데. 단순히 점심에 밥 한 공기를 더 먹어서가 아니라 밥에 담긴 아주머님의 온정 덕분이었으리라.
*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
아파트 배송은 장점과 단점이 뚜렷하다. 장점은 한 동씩 배송을 한꺼번에 할 수 있기에 물량이 잘 빠진다는 것이고, 단점은 배송물품을 잔뜩 가지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 사람이 같이 타면 눈치가 많이 보인다는 거다.
그리고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주의사항. 층마다 배송을 하다가 엘리베이터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 1분, 1분이 귀한 배송업무에서 엘리베이터를 한 번 놓친다면 그날은 뭔가가 꼬인 날이다.
어느 아파트 단지 10층의 집이었던 것 같다. 물건을 문 앞에 두고 배송 완료 사진을 찍는데 문 옆 아이스박스가 놓여 있었고 이런 종이가 붙어 있었다.
'택배기사님, 더운 여름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이스박스에 생수와 커피 있으니 가져가세요.'
엘리베이터 문에 물건을 담았던 트레이를 걸쳐놓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엘리베이터를 놓칠 뻔했다. 약간 문화충격 같은 걸 느꼈다. '와, 이런 사람도 있구나'. 아이스박스를 열어보니 정말로 얼린 생수 몇 병과 캔커피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생수와 커피를 하나씩 손에 쥐고 엘리베이터를 다시 타는데 뭐랄까 감사함을 넘어서 존경심도 들고. 정말 다른 시각으로 사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아이스박스 위의 그 문구를 봤을 때 약간 시간이 멈춘 듯한 '놀람'이 마음에 저장되어 있다.
언젠가 축구선수 안정환이 지네딘 지단과 경기했던 걸 떠올리면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분명 같은 그라운드 위를 뛰고 있는데 지단만 전혀 다른 공기에서 공을 차는 것 같았다."
그동안 숱하게 택배로 물건을 받으면서 한 번도 나는 떠올리지 못한 생각이었고, 아이디어였고, 깊은 배려였다. 세상엔 나와 전혀 다른 깊이와 넓이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체감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