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함께' 비효율적이고 기약이 없어도

by 김이안


함께 있어준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대개 함께 있어줌이 필요한 경우는, 그 사람이 힘들 때다. 그 사람은 물론이고 나 역시도 딱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 그런 답 없고 막막한 상황을 함께 견뎌줘야 한다는 게 쉽지 않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 곁에 그저 같이 머물러줘야 하는 게 어려운 거다.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에서 긍정성의 과잉이 우리를 피로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그 압박이 우리에게 쉼 없이 무언가를 하는 행위에 몰두하게 하고, 그게 자기 착취로 이어진 다는 거다. 최근에 출간한 <신에 관하여>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신께 드리는 '기도'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의 대표적인 예라고 소개한다.


그래서 기도라는 것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어려운 게 아닐까 한다. 기도를 지속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생산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걸 못 견디는 데 있다. 기도는 신을 생각하고, 어떤 기도제목을 구하고, 신의 임재를 느끼려 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털어놓는 일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능동적인 행위와는 무관하다. 그러니 기도를 하다 보면 현타가 오기도 한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걸까'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지만 한편으로, 정말 내가 어떻게 감당이 안 되는 문제와 고통 앞에선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오히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어찌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게 하는 거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 나 혼자라고 느낄 때, 그때 오히려 신이 나와 함께 해주신다는 걸 깊이 경험하기도 한다. 캄캄한 어둠 속에 별이 오히려 잘 보이듯이, 그렇게 어둡고 외로운 시간 속에 오히려 나와 함께하는 신의 현존을 더 선명히 경험하게 된다.




내가 처음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의 힘을 깨닫게 된 건 중학생 때였다. 점심시간이면 급식을 먹고 친구들과 축구하는 게 하루의 중요한 일과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점심 먹은 게 체했는지 배가 계속 아픈 게 아닌가. 친한 친구들은 여느 때처럼 축구하러 운동장으로 나가고, 나는 교실에 남아 배를 부여잡고 책상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장수'라는 이름의 친구가 옆에서 그저 있어줬다. 이름 때문에 개장수, 물장수, 박장수로 불리던 친구. 그렇게 친한 친구는 아니었는데 이 친구는 '야 괜찮냐?' 하면서 이상하게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옆에 있어줬다.


아픈 내 옆에서 그냥 있어준 그 친구. 다음날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러 나갔고, 그 친구와 특별히 더 자주 어울려 지낸 건 아니었지만, 그저 함께 곁에 있어준 그 친구의 얼굴과 그 상황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대학원 졸업이 꼬여서 한 학기를 더 다니게 됐을 때, 인턴과정도 물 건너가고, 낙담하고 있을 때. 멀리 아산에서 그저 나를 만나고 밥 사주려고 온 선배도 떠오른다. 서울역에서 만난 그 형에게 물었다. "아니 형 뭐 하러 여기까지 이렇게 왔어요." "너 밥 사주려고 왔지. 으이그~" 아니, 그저 날 만나러 아산에서 서울까지 온다니. 이 무슨 비효율적인 일인가. 시간이 남아도는 형도 아닌데. 길어야 두 시간 만나고 다시 또 내려가야 할 텐데.


그렇지만 분명히, 이 만남 후로 나는 조금씩 제정신을 찾기 시작했다. 마음에 힘을 얻었고, 꼬여버린 상황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갈지 생각하게 됐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준다는 건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일이다. 기약없는 일에 내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뭔가 생산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함께 그 무력한 시간을 같이 감내하는 것 뿐. 그래서 어렵다. 뭐라도 내가 행동을 하면 낫겠는데, 그저 존재 자체로 같이 있어준다는 것이. 그렇지만 이렇게 '무용'해 보이는 그저 함께 있어주는 일이 어떤 이에게는 깊은 어둠 속 촛불 하나의 빛이고 따스함이 된다.


최근, 송지영 작가님의 <널 보낼 용기> 북토크에 다녀왔다. 마침 이사한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북토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신청했다. 한편으로는 작가님의 활동을 계속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작년 12월, 작가님 북토크에 한번 참여한 적이 있어서 이번이 두 번째였음에도 새롭게 와닿는 부분들이 있었다.


작가님은 북토크를 하면서 다양한 독자들을 만나게 됐고, 그중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는 연락을 주고받으며 계속 시간을 내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언제든 편하게 연락해서 만나줄 수 있는 사람으로, 곁에 있어주는 사람으로. 그게 참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존재 자체로 힘이 되어 주는 일이기에, 작가님이 이 귀한 일들을 오래 지속할 수 있기를 마음 다해 응원했다.



한 사람의 마음 곁에 선다는 건, 사랑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침묵을 견디는 태도, 다가서지 않을 용기, 말 대신 기다리는 기술 같은 것들. 언젠가 또 다른 마음 앞에 서게 된다면, 나는 그때의 서툴렀던 손끝을 떠올릴 것이다. 닿지 않아야 닿을 수 있다는 걸, 아이에게서 나는 배웠다.


_ 송지영, <널 보낼 용기> 108p



그저 곁에 있어준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어색한 침묵을 견디고, 인내로 기다려주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고, 닿지 않음으로 상대에게 닿아야 한다니. '나'라는 존재 자체로 그저 곁에서 묵묵히 감내해 주는 것. 어쩌면 내가 기도할 때 신도 그걸 알기에 그저 내 곁에서 묵묵히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 느끼게 해 주시는 건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삶의 위기 때마다, 드러나지 않게 내 곁을 지켜주고, 시간을 내어준 이들이 있었다. 결국 시간을 내어준다는 건 '나'라는 존재를 내어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함부로 다가서지 않는다는 건, 기약 없는 그 막막하고 무력한 시간을 함께 감내해 준다는 의미다. 긴 겨울이 지나면 메말라 보였던 씨앗에서 싹이 돋아나듯, 언젠가는 마음 안에 빛과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길 것을 믿음으로 기다려주는 것.


그저 곁에 함께 있어준다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기약이 없지만, 누군가를 다시 일으키는 가장 확실한 행동이 아닐까. 분주함과,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누군가에게 내 곁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다시 생각해 본다. 짧은 인생, 내가 성취하면 얼마나 성취할 것이고, 목표를 이루면 얼마나 이룰 수 있겠나. 결국 남는 건 사람 뿐이다. 내 곁에 소중한 이들이게 '그저 함께' 옆에 있어주고, 견뎌주고, 닿지 않는 사랑으로 가 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누군가를 살리는 '그저 함께'의 은은하지만 확실한 힘을 계속 확인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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