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
p38.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았다. 푸른 기운을 띄던 숲이 자줏빛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p58.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 없었습니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손을 대면 쓰러지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까, 멀어져 버릴까 언제나 주춤.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p74.
어떤 울음이 안에 있던 것을 죄다 게워내고 쏟아낸다면, 어떤 울음은 그저 희석일 뿐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농도를 묽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요.
p147.
사람이 유동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그 변화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과정이라는 생각이요.
p155.
그들의 관계는 역광 속에서 찍은 사진과 비슷해요. 온전한 마음이나 진심을 주고받고 싶었으나 잘 살려고 애쓰다 보니 진심은 가려지고, 마음은 흔들리고, 그림자 같은 오해만 남았죠. 그래도 이들이 가족이 되고자 해온 노력이 실패나 아픔으로만 남지 않았기를 바라요. 너무 밝은 빛 속에 감추어둔 마음이 언젠가는 서로에게 닿을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p165.
사는 게 다 그렇듯 힘든 순간도 있겠지만 계속 슬프진 말기를, 서로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언정 각자 건강히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는 사람이다.
p172.
나는 어떨까.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은.
우리가 맞을 무수한 여름이 보다 눈부시기를.
어딘가 두고 온 불완전한 마음들도 모쪼록 무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