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현
p19.
부모의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살면서 경험해 온 불안과는 방향이 다른 불안이기 때문이다.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경험하는 불안은 세상의 것을 내 안으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생긴다. (중략) 이런 방향성의 관점에서 보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다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p20.
그런데 아이를 낳으면 경험해보지 못한 불안이 찾아온다. (중략) 내 품(안)에 있던 아이가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세상을 향해 멀리 떠나는 것을 수용하고 그 과정에서 오늘 불안을 견뎌야만 한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바깥의 것을 내 안으로 가져오지 못해서 느꼈던 불안과는 180도 다른 방향에서 오는, 낯설고 익숙해지기 힘든 불안이 바로 '부모라는 존재의 불안'이다. 익숙해질 만하면 아이는 내게서 조금씩 더 멀어지고 새로운 과제를 마주하니 다시 마음이 흔들린다.
p22.
우리 삶에서 불안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다. 부모가 비를 그치게 할 수는 없다. 대신 자녀가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이 되어주자. 부모가 불안을 대신 맞아주며 자녀와 함께 걸어가 준다면, 자녀는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p25.
아이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부모를 뛰어넘는 상상을 하고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데, 완벽한 부모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느껴져 아이가 부모의 그늘 안에 안주하게 만든다. (중략) 아이가 독립적인 어른으로 성장하려면 아니가 자라면서 안전감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세상을 믿을 만한 곳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p30.
불안하고 위태로운 이 시기에 성인기의 발달 과정을 이해하면 삶의 균형을 잡아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이 시기를 지나는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하는 문제이며, 누구도 완벽하게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힘들더라도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않을까.
p35.
이렇게 늘어놓고 나니 고민도 책임도, 불안도 가장 많은 시기 같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배가 똑바로 나아가려면 바닥짐을 실어야 하듯, 우리에겐 늘 어느 정도의 근심, 슬픔, 결핍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무거운 바닥짐이 오히려 '나'라는 배가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p40.
분석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중년기를 인생의 정오(noon of life)라고 했다. 오전 중에 중요한 일을 마치고 여유롭게 점심식사를 하며 오후를 맞이하는 사람과, 느지막이 일어나서 이제 하루를 시작하려고 기지개를 켜면서 정오를 맞이하는 사람이 하루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p43.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해진다. 완성되었다고 믿고 싶은 현재에 머물며 잘못을 해도 반성하기보다 합리화하고 변명하기 급급하다. 정당한 비판에 발끈하며 민감하게 반응하기 일쑤다. 결국 나름대로 완성된 중년기의 모습에 머무른다. 내게 관대한 대신 타인에게, 특히 가까운 가족이나 자녀에게 가혹해지기 쉽다.
p46.
중년기의 불안은 내 위치를 재조정하고 삶의 자세를 바꾸는 것으로 많이 해결할 수 있다. 삶의 재미와 행복을 얻는 방법, 관계의 깊이와 폭, 일하는 자세와 성취감을 느끼는 영역 등 많은 것을 청년기와 달리해야 한다.
p51.
반대로 '내재역량'이란 이러한 노쇠 현상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걷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내재역량이 0.5라고 하자. 만일 내재역량이 0.7인 사람이 있다면, 폐렴으로 2주 동안 입원해 내재역량이 0.1 감소했다고 해도 완치 후에 걷는 데 무리가 없다. 그런데 내재역량이 0.51인 사람이 똑같이 아팠다면 어떻게 될까? 폐렴을 앓고 난 뒤로 갑자기 걷기 어려워질 것이다. 걷는 것도 힘드니 근력을 유지하거나 이전 상태로 회복하기도 어려워진다.
p77.
자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목표를 이뤄나가지 않는다고 화내거나 너무 속상해하지 말자 생각해 보면 나 자신조차 내가 원하는 존재가 되기 힘들지 않은가.
p95.
정신분석가 데이빗 엘킨드는 청소년 자기애의 특징 세 가지를 제시했다. 뭐든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느끼는 전능감,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나는 유일한 존재라고 여기는 독창성, 그리고 나는 절대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p99.
저명한 교육자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는 "현명한 교육자는 아이에게 부족한 것을 찾지 않고, 아이가 이미 가진 것을 기뻐한다."라고 말했다.
p164.
그래도 잔소리를 한마디 해야 한다면 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이자 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정점과 종점 규칙을 제시한다. 가장 좋았던 시기와 마지막 순간의 경험이 전체적인 인상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자면 중간에 칭찬할 만한 이야기를 하나 넣고 마지막에는 좋은 이야기로 마무리한다고 생각하고, 그 사이에 정말 하고 싶은 잔소리를 짧게 하는 것이 좋다.
p180.
결혼 이후의 인생 트랙에 대한 부담도 있다. 한국의 합계 출산율은 1990년 1.57에서 2022년 0.78까지 줄어들었는데, 그만큼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에 대한 부담이 큰 사회다. 충분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부부 중 한 명, 높은 확률로 여성이 경력단절을 경험한다. 아이와 함께 살아야 하는 집값과 양육비도 부담이고, 여성은 독박육아까지 걱정해야 한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구체적으로 고민할수록 아이를 낳기가 더 망설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