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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봄 Dec 27. 2020

이길 수 있을 때 져주기

  제대로 하는 팽이치기는 처음입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몇 년을 살았지만 팽이치기를 해 본 적은 없어요. 이미 팽이를 돌리고 노는 세대가 지났기도 하고, 남자아이들이 간혹 팽이를 가지고 놀았다 해도 별 관심이 없었을 거니까요. 어쨌든 제가 아는 팽이는 아들이 가지고 노는 베이 블레이드가 전부입니다. 한 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만났다 하면 집이고 길바닥이고 일단 한 판을 붙어야 하는 그 팽이 장난감 말입니다.      



  얼음판에서 진짜 팽이를 돌려봤어요. 사실 돌렸다기보다 돌리려고 애썼다고 하는 편이 솔직하겠네요. 팽이를 채에 감고 돌린 다음 넘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채찍질하면 되는 것인데 이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더라고요. 일단 팽이를 돌아가게 던지는 게 안 됩니다. 이리저리 요령을 배워보지만 한 시간 내내 한 번 성공에 그쳤어요. 그마저도 시원하게 뱅글뱅글 돌린 것은 아니니 자신 있게 성공했다 하기도 뭐하고요.      



  원래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노는 건 아이들이 하는 일이고, 저는 다치나 안 다치나, 장갑을 팽개치고 맨손으로 노는 건 아닌가 감시할 계획이었지요. 아이들 성화에 얼음판에 내려섰는데 보기엔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이는 팽이가 안 돌아가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한 시간이 넘도록 추운 줄도 모르고 용을 썼어요. 베이 블레이드를 사 준 값이 아깝지 않게 아들은 꽤 잘 돌립니다. 엄마 그게 아니지,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 봐 잔소리까지 해가면서요. 해가 살짝 기울도록 논두렁 팽이치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손이 꽁꽁 얼 때까지요.      



  좀처럼 같이 놀아 주는 법이 없는 엄마가 팽이치기가 파 할 때까지 얼음판 위를 떠나지 않으니 아이들도 덩달아 신이 났습니다. 딸은 그렇게 재밌냐며 엄마가 우리보다 더 신나 보인다고 신기해합니다. 아들은 자기가 엄마보다 팽이를 더 잘 돌릴 수 있다면서 어깨가 으쓱해졌고요. 엄마도 더 연습해서 자기와 대결해보면 좋겠다고 합니다. 엄마보다 잘하는 게 있을 때, 아빠와의 대결에서 이겼을 때 아이들이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들 보기에 뭐든 잘하고, 대단해 보이는 엄마 아빠를 이기는 건 그렇게 신나는 일인가 봅니다.       



  머지않아 아이들과 달리기 시합에서 지게 되겠지요? 지금은 비교도 안 되는 공기놀이 실력도 금방 따라 잡히고, 딴에는 최선을 다한 체스게임도 지게 될 거고요. 그러다 더 이상 같이 놀자는 말을 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올 거고요. 아이들은 모를 겁니다. 내가 이기는 순간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엄마가 나이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걸 말입니다. 엄마에게 물어볼 것이 적어지고, 내가 엄마보다 아는 게 더 많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올 거라는 걸 말입니다. 나에게 질문하고 부탁하기 위해 전화하면서 늙어가는 엄마 모습에 마음 아플 때도 생길 거라는 걸 말입니다. 나보다 힘이 세고, 더 많이 알고, 뭐든 더 잘하는 엄마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은 아직 모릅니다.       



  더 자주 더 신나게 놀아야겠습니다. 정정당당한 승부의 세계를 가르치고 패배를 인정하고 승복하는 태도를 길러주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스리슬쩍 이기게 해 주고 아이가 기뻐할 기회를 주어야겠어요. 엄마를 이기는 게 당연해지고 더 이상 즐겁지 않을 때가 곧 올 테니까요. 그때가 오기 전에 최선을 다해 티 안 나게 져주려고요. 일단은 맹추위가 오기 전에 다시 팽이를 돌리러 가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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