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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봄 Dec 21. 2020

산타 커밍아웃

  개구쟁이 사촌 오빠들의 폭로로 7살의 나는 산타를 잃었다. 내 눈물 바람에 오빠들은 거짓말이라 얼버무렸지만 깨어진 비밀이 다시 봉인될 수는 없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 유치원에는 다시 산타가 찾아왔다. 나는 이미 산타의 비밀도 알았겠다 엄마한테 몇 번이나 얘기해 둔 인형 집이 산타의 꾸러미에 들어 있을 거라 기대했다. 30년이 지나도록 이름조차 잊히지 않는 그 장난감, 쉬라의 집. 잠금장치를 열면 양쪽으로 펼쳐지는 근사한 2층 집이 얼마나 갖고 싶었던지. 그런데 정작 산타가 내민 선물은 너무 작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상자 안에는 목도리·모자 세트와 동화책이 들어 있었다. 선물을 받아 들고 웃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기다리는 선생님을 향해 웃어야 했는데, 웃어지지 않았다. 시무룩한 얼굴로 선물을 들고 찍은 사진은 지금도 앨범에 남아 있다.           



  지금도 종종 엄마한테 쉬라의 집 이야기를 한다. 다른 장난감도 아니고 대체 왜 목도리를 준거냐고 따지듯 엄마를 놀린다. 그러면 엄마는 네가 그 나이 되도록 마음에 담아 둘 줄 알았으면 그냥 사줄걸 그랬다며 매번 미안해하신다. 원하는 장난감을 모두 사주기에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고, 산타 선물을 준비하는 김에 마침 필요했던 목도리를 골랐을 엄마를 이해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엄마를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7살 전후로 받았을 모든 선물 중 오직 그 목도리만 기억에 남은 것을 보면 그 해 크리스마스에 받은 실망과 충격이 이 크기는 했던 것 같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본인 어린 시절의 결핍을 채워주려 한다. 자신에게 부족했던 특정한 물건이나 감정을 자식에게 충분히 제공하고,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기뻐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이 부모의 큰 행복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결핍은 나의 결핍이지 아이의 결핍은 아니라는데 있다. 그러니 아이의 입장에서는 결핍의 충족이 아니라 만족의 과잉이 되고 마는 것이다. 



  평소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많이 사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목도리의 충격을 기억하며, 크리스마스 선물만큼은 아무리 쓸데없는 것이라 해도 아이들이 원하는 것으로 준비했다. 이왕이면 크리스마스가 정말 즐거운 날로 기억되도록 해주고 싶었다. 산타의 선물에 더해 나와 남편이 주고 싶은 선물, 여기에 조부모의 선물까지, 장난감을 한 아름 받아 든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었다. 웃음은 값졌지만 2020년을 사는 내 아이들에게 양팔 가득한 장난감은 찰나의 기쁨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트리 아래 수북이 쌓은 선물은 장난감이 고팠고 영화 속 크리스마스 파티가 부러웠던 어린 나에게 주고 싶은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물질적인 만족은 생명이 짧다. 아이들 역시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금세 다른 것으로 관심이 옮겨가는데, 충족과 새로운 욕망 사이가 지나치게 짧다 보니 부모로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지금이야 갖고 싶은 것이 레고나 인형이지만 욕망의 크기와 가격은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자랄 것이고,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모는 그 욕망을 모두 채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욕망의 충족은 대개 돈이 들고, 우리의 돈은 한정적이므로 현명한 취사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린아이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라고 믿기 때문이다. 평범한 우리는 wants를 충족할 수 없으며 needs를 먼저 채우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알려줄지 결정하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나는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아이들과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어 볼 작정이다. 큰 아이에게 적당한 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3학년인 아이가 산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를 한참 남긴 여름께부터 산타의 존재를 거듭 확인하며 의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아니, 의심 정도가 아니라 산타는 존재하지 않음을 확신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다만 부모가 주는 선물과 산타의 선물을 모두 받고 싶기 때문에 애써 믿는 척할 뿐이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터울 지는 언니 오빠가 있는 아이들은 이미 부모가 산타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촌오빠들이 나의 산타와 크리스마스를 너무 일찍 빼앗아 버린 것처럼 말이다. 어설픈 거짓말로 산타를 지켜주기에 딸이 너무 커 버렸으니 이제 아이들에게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 주려한다. 사실 산타는 엄마 아빠였단다! 그렇다고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못 받는 건 아니야. 앞으로는 가장 갖고 싶은 선물 한 가지를 엄마 아빠 산타가 선물해 줄 테니 심사숙고해서 골라야 해. 둘째에게 산타라는 존재가 주는 기대와 행복을 너무 일찍 빼앗는 것은 아닐까 고민했지만 아이들의 산타는 나의 산타와 같은 무게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앞으로도 우리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 불을 밝히고, 쿠키를 굽고 선물을 나눌 것이다. 캐럴을 따라 부르고, 함께 나 홀로 집에를 보며 깔깔댈 것이다. 이브에 잠들며 설레는 마음과 산타의 서프라이즈 선물을 뜯어보는 재미가 조금 덜 할지는 몰라도 또 괜찮을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크리스마스는 매년 돌아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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