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7살 차이가 나는 외삼촌을 업어 키우다시피 하셨다고 해요. 엄마가 첫째라 해봐야 여덟아홉의 어린아이였을 뿐인데 말이죠. 엄마뿐만 아니라 5,60년대 출생인 부모님들 세대는 그와 비슷한 집들이 즐비했을 거라 짐작합니다. 부모가 들로 밭으로 일하러 가려면 몇 살이나마 나이가 많고, 사리 분별이 가능한 큰 자식들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동생들의 식사며, 안전에 대한 당부는 모두 첫째에게 집중되었겠지요. 하지만 제가 나고 자란 80년대는 이미 그 시절을 훌쩍 지났음에도 첫째들에게 부과되는 책임의 말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요즘도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오빠 하나를 둔 막내로 자랐기 때문에 첫째들이 받는 책임과 모범의 압박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어른들이 첫째들에게 인사처럼 덕담처럼 내뱉는 당부들이 항상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어요. 네가 큰 아이니까 잘해야지, 동생이 어리니까 양보해라, 첫째가 잘하면 동생들은 보고 배우는 법이니 네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와 같은 말들이 그렇게 듣기 싫을 수가 없더라고요. 첫째라 해봐야 두세 살 차이고, 그보다 좀 많다 해봐야 아이들이기는 매양 한 가지인데 왜 첫째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출생 순서와 관계없이 모든 자식을 평등하게, 그러니까 첫째도 똑같은 아이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둘째를 낳고 키우며 본격적으로 배어 나왔습니다. 첫째를 외동으로 키웠다면 하지 않았을 큰 아이 대우는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첫째에게 동생이 너보다 어리기 때문에 돌보고 양보해야 한다는 식의 말은 하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어떤 순간에도 첫째가 둘째의 보호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네가 첫째이니 동생보다 더 좋은 것, 비싼 것을 가져도 된다는 식의 허락도 피했습니다. 가능하면 둘 사이가 나이 차이와 누나·동생 사이를 떠나 일대일의 인간관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는 게 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기회는 항상 찾아옵니다. 첫 번째는 외국에서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면서였어요. 외국이다 보니 한국에서 영어 유치원을 다녀 의사소통에 크게 문제가 없었던 첫째와 달리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둘째가 마음에 걸렸어요. 한국에서 유치원을 보내도 낯선 공간과 낯선 사람들에게 적응해야 하는 아이가 걱정인데, 말도 통하지 않는 곳이라니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제가 선택한 유치원은 만 4세~만 6세 사이의 아동들을 연령에 관계없이 통합수업하는 곳이었습니다. 위치가 집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누나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둘째의 적응이 수월하겠다는 생각에 둘을 함께 보내기로 한 것이지요. 그리고 제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큰 아이에게 동생을 부탁했습니다. 화장실 가고 싶은지, 물 마시고 싶은지 한 번씩만 물어봐줘. 누나가 있어서 둘째가 편안한 마음으로 빨리 적응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첫째가 동생 때문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00 이가 울었다, 자기만 졸졸 따라다닌다는 불평을 자주 했거든요. 동생은 영어를 못하니 네가 좀 돌봐주면 좋겠다고 부탁한 첫째 또한 고작 만 6세였습니다.
10살을 넘긴 첫째는 이제 뭐든 혼자 하려고 합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또래 아이들이 학교며 학원을 혼자 걸어 다닌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툭하면 연습을 외쳐대요. 그날도 첫째는 저에게 가져다 줄 소화제를 사러 집 앞 편의점에 가려는 참이었지요. 엄마 약 사러 가는 길에 자기도 가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둘째를 말릴 기운이 없던 저는 꼭 손잡고 다녀오라는 말만 하고 누웠습니다. 사실 둘 모두에게 말했지만 그 당부는 첫째에게 향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어요. 잠시 후 약을 사서 돌아온 큰 아이는 씩씩거리며 다시는 동생을 데리고 어디도 가지 않겠다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유인 즉, 손을 잡기는커녕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둘째 때문에 후드티셔츠 모자를 잡아끌고 길을 건너야 했다는 것입니다. 앗차, 내가 또 너에게 동생의 보호자가 되게 했구나. 그렇지 않아도 곧이곧대로 인 네가, 엄마가 손잡고 다녀와야 했으니 손을 잡았어야만 하는 네가, 저 천방지축을 데리고 힘들었겠구나.
대개 사람들이 첫째는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고, 책임감이 강하다고 말합니다. 큰 장점입니다. 첫째들이 보이는 그런 특징이 부모들의 양육방식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부모의 당부와 부모의 부재 시 동생을 돌보아야 한다는 부담에서 만들어진 책임감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방법이 아니어도 책임감을 길러줄 수 있는 길은 있을 거예요.
사정상 시골에 잠깐 머무르는 동안 만들기를 좋아하는 첫째는 미술학원에 피아노를 사랑하는 둘째는 피아노 학원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학원이라 한 곳으로 보내면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수고를 줄일 수 있는 터라 고민했지만 결국 각자 원하는 학원으로 등록해주었어요. 무엇보다 큰 아이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고 싶었거든요. 아무래도 같은 학원에 다니면 둘째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요. 첫째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누구를 만나고 뭘 배웠는지 종알대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엄동설한에 이 길을 두 번이나 왕복하려면 오후 내내 바쁘겠지만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잠시나마 누구의 누나, 누구의 동생이 아닌 오로지 자신으로 존재하다 돌아올 것이고, 단 둘이 걷는 시간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줄 엄마를 오롯이 차지하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