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챔피언 [부제 : 잊힌 챔피언 벨트]
김옥겸 : 과거의 슈퍼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한자옥 : 항상 잘 나가던 챔피언의 아내.
김제일 : 김옥겸과 한자옥의 장남 / 장남으로써 열심을 다해 자신의 일을 잘해보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김승일 : 김옥겸과 한자옥의 차남 / 차남으로써 사랑을 받고, 자신의 영역만 잘 해내가고 싶지만 자꾸 터지는 집안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치부하며 빚에 허덕이며 산다.
"아빠가 왕년에는 말이야!"
왕년에 잘 나가던 동양챔피언이자 한국 챔피언.
자신의 스크랩과 트로피를 애지중지 신줏단지 모시듯 살아가지만.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자신이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기엔.
왕년의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은 그냥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다.
운동할 때처럼 성실히 열심을 다해, 자신의 삶과 가정을 책임지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은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다.
"야 인마! 열심히 하는 놈이 잘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놈이 열심히 한 거야!"
그래도, 열심히 착하게 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김옥겸"
평범하다고 하면 평범하고, 특별하다 생각하면 특별한.
현시대의 4인 가족에 대한 이야기.
"모두가 우리처럼 살지는 않아"
"하지만 각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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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그만 좀 해 이제 짜증 나니까!"
"이 무능력한 인간아!"
"내가 분명히 말했지, 두 번 실수하지 말라고!"
"개 시 발 새 끼 야!"
"넌 아빠도 아니야!"
"이 시발 새끼야!"
"니가 좋아서 만나 저 여자 하고, 만나서 니가 날 만들었잖아!"
"원망하지 마!"
"시발,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왔냐!"
"이 시발 거지 같은 집구석에서 니들이 날 이렇게 만든 거야!"
"거지 같은 집구석 내가 이젠 진짜 니 둘 안 본다!"
"미안하다."
"미안하단 말 좀 그만해 새끼야!"
"그러기 전에 잘하지 그랬냐!"
"이 나약한 새끼야!"
"부모 노릇 못한 인간들한테 가족이란 단어도 쓰기 싫어!"
"힘들 때만 연락하고, 도와달라고 하면 그게 가족이야!"
"이제 나 좀 사람처럼 살자!"
"나도 아내가 있고 가정이 있어!"
"세희는 무슨 잘 못인데!"
"거지 같은 집안에서 자란 못난 사람 사랑한 게 그게 잘 못이야?!"
"어! 말 좀 해봐!"
"이럴 거면, 차라리 낳지 말지 그랬어!"
"니둘만 그냥 사랑하고 끝내지 그랬어!"
"이 구질구질 집구석에서 이 정도 니들한테 손 안 벌리고 컸으면 됐잖아!"
"미안하다. 아빠가 많이 아프다."
"얼마 살지도 몰라."
"술 먹고 들어와서 나한테 할 소리냐?!"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야!"
"그래,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
"말해봐, 어디 들어나 보자?"
"그냥, 쫌 아프다.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
"뭐?"
"엄마, 이 사람 이제 내 아빠 아니야!"
"그런 줄 알아!"
"니미 시발 이제 나한테 연락하지 마!"
"근데, 그 돈은 내가 안 썼어"
"그게 무슨 또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니 형 하고 엄마가 힘들어서 또 썼나 봐."
"나는 진짜 모르는 일이야!"
"어?"
"참 니들 가지가지 한다들."
"나는 뭐 이 집의 노예냐?"
"니들이 필요할 때만 불러서 쓰는 노예냐?"
"참 진짜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네."
"개 십창들아 니들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나 욕하지 마, 난 니들한테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
"하고 싶은 말도 안 나온다."
"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
안 쪽 문과 바깥문을 새찬 발길질로 차고 대한이가 나간다.
찌렁내가 진동한다. 치우지 않은 개와 고양이의 똥이 나뒹구는 골목길.
옆 집 개는 39분을 쉬지 않고, 대한이가 퍼부은 분노의 단어들에 자신이 더 화가 났던지 짖어댄다.
어쩌면 자기도 못한 사람새끼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건 아닐까?
짐승만도 못한 새끼가 자산의 어미, 아비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그렇게 등지고, 눈물을 흘리며 골목길 어귀를 지나간다.
자신의 부모에게는 그렇게 강하고, 할 말 안 할 말 다 퍼붓고 거리를 나서는 대한이는 87년생 토끼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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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 알람 소리를 끈다. '이놈의 알람 소리.'
사람을 정말이지 미쳐버리게 만든단 말이지.
그러면서 핸드폰은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알람 소리를 끄고, 수동적 알라 설정을 15분 뒤로 다시 맞추고, 이불속에서 조금 더 몸을 가둬 둔다.
인간의 게으름은 신이 인간을 질투해서 만들어 놓은 옵션 기능인 것 같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능동적으로 열심을 다해 노력을 했다면, 신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만 감은체 이런저런 잡생각들로 뒤척이다 수동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베개에서 머리를 드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나?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뇌를 뒤흔들고 혈액을 타고 내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것만 같다.
입에서는 썩은 똥 네가 올라온다.
치아에 남아 있는 어제 먹은 잔여물들이 더러운 기분을 더욱 더럽게 만든다.
"얼마나 마신 거냐 너는!"
"신기해 집은 곧장 잘 찾아오는 것을 보면!"
"어제 네가 들고 온 쓰레기봉투 안에 물컹 거리는 게 있어서 확인은 못했다."
"괜히, 이상한 토사물 같은 게 들어 있을까 봐!"
"냄새는 뭐가 그렇게 지독한지!"
"현관 앞에 빼놨으니까!"
"출근할 때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놓고 가!"
"원 애가 나이를 먹더니 지 아빠보다 더해 아주 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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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잔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진다.
"에이 그걸 왜 받아서 놔둬!"
"그냥, 버리면 되지!"
"니가 가지고 올라온걸 내가 왜 다시 가져다 버려야 해!"
"마음 같아서는 너의 정신머리도 같이 싸서 내 던져 버리고 싶은걸 애써 참았어!"
"내 뱃속에서 나온 것만 아녔어도 넌 이미 아웃이야! 아웃!"
"늦기 전에 얼른 나와서 북엇국에 밥 한술 말고 출근해!"
참 웃기다, 아웃이라면서 늘 술 취한 나를 위해 엄마는 손수 아침밥 상을 차려 주신다.
나 같은 놈을 그나마 인간으로 대접해주는 유일한 사람.
엄마는 글을 쓰고 싶어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늘 반에서 1, 2등을 도맡아 하며 선생님들의 관심과 이쁨을 받았던 그런 훌륭한 학생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매일 마시는 술 때문에 집안의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자퇴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술상과 매일같이 외상으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할아버지가 싸질러 놓은 똥을 치우기 바빴다.
엄마는 그런 생활이 싫어 집을 나가고 싶었지만, 장녀인 자신만 믿고 살아가는 삼촌과 이모들을 위해 늘 울면서 돈을 벌러 나갔다고 했다.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의 사업이 잘되어 동네 유지로 부유한 하루하루를 살아왔었던 터라 읽고 싶었던 책은 원 없이 읽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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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의 언덕에서 오름과 내림이 교차되는 끝없는 골목길.
주체 없이 목적지도 없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마, 어머니는 길을 걷다가 길을 잃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결혼이라는 선택을 생각 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공중전화 수화기 위, 무심코 놔두었던 수첩이 처음에는 둘의 사이를 이어준 사랑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수첩을 주은 사람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천만 분의 확률이라고 단정 짓기도 힘들다.
그 많은 우연과 필연 인연 그리고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 어른 사고 재해 등.
그 수첩을 사라지게 하거나 다른 사람이 집어 갈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아니면, 어머니의 계산에 의해. 그 수첩의 주인은 필히 본인이 좋아할 만한 매력을 듬뿍 가지고 있어야 했을 사람이었다.
한 입 베어 물면 여기저기 달콤한 향기를 내 품는 수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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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물어 먹어도, 아낌없는 사랑이 넘쳐흘러야만 했다.
상처의 봉합은 수박에 필요 없다. 먹고 남은 껍질만 존재할 뿐.
그 껍질 같은 사랑은 결국 말라비틀어진다.
처음엔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랑이 가능했을 것이다.
돈이 없어도, 구박과 핍박 그리고 설움에도 꿋꿋하게 다 이겨낼 수만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이겨 냈을 것이다.
물리적 상황도 이겨냈으니,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인간이 주는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광주와 부산을 오고 가는 연예의 시작은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심리적 거리를 더 많이 만들어 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보고 싶소."
"난 오늘도 그대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지웠다를 여러 번, 지울 지우개가 없어 눈을 그리다 만채. 연필을 내려놓았소."
"부디, 한 번만 만져볼 수 있다면 오늘 시합에서 맞았던 모든 주먹들이 구름처럼 포근하고 따스할 것만 같소."
"내가 시합을 치르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시오?"
"상대방은 자옥씨를 사랑하는 나와 결투를 벌여야 하는 짐승 같은 인간으로 생각한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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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저 자식을 내가 쓰러트리지 않으면!'
'사랑하는 자옥씨를 빼앗기고 말아!'
'00아 정신 차려 제발 정신 차려!'
"그렇게 난 오늘도 필리핀의 챔피언을 어퍼컷 한 방으로 때려눕혔소."
"사각 링에 올라오는 모든 남자들은 나에게서 자옥씨를 빼앗아가려는 잔인한 폭군에 불가하오!"
"그러니, 난 매번 시합을 이겨야 하오!"
120전 113승 7패. 그의 전적은 19세기 아시아 슈퍼플라이급에서 나올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역시, 사랑의 힘은 분노라는 에너지원을 동력 삼아 무엇이든 때려 부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누구보다 작았지만 그 누구보다 강인했던 그였다.
협회의 정치적 공작만 아녔어도. 그는 대한민국을 빛 낼 수 있었던 작은 거인이었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으며, 막는다 한들 비껴 나지 않으면,
턱주가리가 떨어져 나가는 육체적 아픔을 감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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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휘두른 주먹에 나가떨어지는 링 위의 투사들을 보며,
그는 연민을 느꼈지만 반대로 우월감과 자신의 여자를 지킬 수 있다는 강인함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을 생각하면, 나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소!"
"난 강인한 사람이오. 당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소!"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날을 언제나 기다리겠소!"
남들 부러울 것 없는 집안과 재력을 갖춘 13 남중 12번째의 막내.
여기서 막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13번째 남동생이 잠든 사이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유명을 달리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시샘이었을까? 그가 죽고 난 다음에 12번째 막내의 삶은 이상하리 만큼 풀리지 않았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복싱선수로서의 삶이 자꾸만 꼬여 갔다.
인파 인터였던 그의 복싱 스타일은 전 세계적인 붐을 일으킨 알리라는 복서의 영향으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쏠 수 있는 복서들만 각광받게 했다.
대한민국의 복싱 협회에서도 00의 올림픽 출전 결정전에서 판정을 번복했다.
그리고, 그를 판정으로 꺾은 이가 나타났다.
그는 올림픽 출전을 하게 되었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김옥겸 늘 말한다.
"그때 내가, 판정만 제대로 받았어도 내 삶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야!"
그리고 술잔을 기울인다.
기울이다 못해 퍼붓는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옥균은 술을 마시면 눈 빛이 변한다.
초점은 흐릿해지고, 흐릿해진 초점 사이로 눈동자는 탁해진다.
가로등이 없는 짙게 깔린 안개가 가득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만 같다.
그의 눈 빛에선 삶에 대한 빛이 없다.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욕심도 없다.
하지만, 하루를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산다.
내일 죽을 것처럼. 자신을 몰아붙인다.
아직도 남들은 힘들어하는 철거라는 일을 쉼 없이 해낸다.
66살의 나이.
정상적인 직장인 또는 벌이가 좋은 장사꾼들은 남을 써가며 돈을 벌 때.
자신은 자신을 써가며, 돈을 벌려고 한다.
아니, 돈을 갚기 위해 일을 한다.
착하면, 몸이 고생한다고 하지 않던가.
착한 첫째 자식의 현장에서 돈을 갚기 위해 일한다.
그래, 나이가 있는 그를 받아 줄 때가 어디 있겠는가.
첫째 자식 놈도, 착해서 고생이다.
호기롭게 시작한 인테리어 사업에서 보기 좋게 사기를 당한다.
고약한 건축주는 그 둘을 이용했다.
아니, 자신은 그것을 정당한 것이라 자부하며, 돈을 써가며 좋은 변호사를 선임했겠지.
추가 공사 비용은커녕 모든 공사비용을 첫째 아들이 물어줘야 하는 상황.
자신이 믿었던 업자에게 컴퓨터를 빼앗기고,
그 컴퓨터 안에 있던 채무 내용과 공사내역을 건축주는 자신의 입에 맞춰 이용했다.
법원은 건축주의 손을 들어주고.
추가 공사비용 2억 원가량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세상이란 이런 것이다.
그렇다.
착하면, 호구.
나쁘면, 악덕 부자.
등처발림 당한 놈이 멍청한 놈.
네가 번 돈은 그대로 더 나쁜 놈들한테 흘러 들어간다.
이 일도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들어보니 어이가 없다.
11층의 건물 리모델링 공사를 받게 되었다는 김제일.
제일이가 승일이가 운영하는 카페로 방문했다.
"야 승일아 형이 경험 삼아 인테리 공사를 크게 한 번 해보련다!"
"딱 떨어지거나, 조금은 손해를 볼 것 같은데!"
"일단, 한 번해보려고!"
"사업의 시작은 실패에서 시작된다고 하지 않던!"
이 말을 들은 승일은. 기가 차서 찬물을 끼얹는다.
"그때 2000만 원도 사기 맞았잖아."
"근데 무슨 8억짜리 공사를 그렇게 쉽게 생각해."
"인테리어 하려면, 일단 회사 자체에 자본이 있어야지"
"그리고 그렇게 큰 공사 하려면, 건축사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제일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다.
노트북 모니터를 강하게 내리 치듯 닫는다.
"야이 새끼야! 형이 한다는데 초 칠래?"
"내가 너한테 돈을 달라고 했냐, 투자를 하라고 했냐!"
"형이 알아서 한다고 하는데, 너는 꼭 그렇게 니 잘난 척을 해야겠냐?"
"그럼 너는 이 조금 한 매장 하나 운영한다고 위세냐?"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새끼!"
"평생 그렇게 작은 일만 하면서 살아라 새끼야!"
제일이는 그렇게 승일을 나무라고 매장 문을 닫지도 않고 사라졌다.
승일은 매장을 나간 제일을 보며, 속으로 속삭인다.
'커피 값은 주고 가지.'
'그렇게 잘난 새끼가 맨날 커피 값 계산도 안 하고 그냥 가네.'
제일을 생각하는 승일은 어렸을 적 추억이 하나 떠오른다.
제일이 야구를 시작하기 전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상/하방에 얹혀살던 승일의 가족은 언제나 습하고 눅눅한 여름을 보내야만 했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날에도 북향을 바라보고 있던 승일의 집은 언제나 푸른곰팡이가 벽지를 타고 번졌다. 바퀴벌레와 쥐며느리가 늘 기어 다니며, 새빨간 지네가 발을 기어 다닌 적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신의 가호로 물리지 않고, 다리를 기어가던 느낌에 불을 켜고 악을 질렀다. 그 소리에 큰 방에 있던 아빠가 와서 지네를 잡아 살려주었던 기억에 아직도, 섬뜩하며 피부 세포 하나하나가 쭈뻣 쭈뻣 선다.
하루는 5살 차이의 제일이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난 쪽팔려서 친구도 못 데리고 올 것 같은데.) 제일이는 동네 친구들이 많았다. 작은 방에서 친구와 만화책을 돌려보던 제일이 큰 방에 피신가 있는 승일을 불렀다.
"승일아!"
"야 김승일!"
"큰 방에 있는 거 다 알아 새끼야!"
"라면 좀 끓여와라! 좋은 말로 할 때!"
승일은 자신이 없는 것처럼 숨죽이고 있었지만.
제일의 손바닥 안이였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승일은 가스가 끊겨, 휴대용 버너를 사용하는 집에서.
버너에 불을 붙였다. 가스 냄새 게 흘러나오며, 라면과 여러 기름 때로 오일이 배어 있는 낡은 버너는 자신의 역할에 늘 충실했다. 차라리 고장이라도 났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언제나, 버너는 힘을 내어 우리의 배를 채워주는 라면을 충실히 끓일 수 있는 축복을 선사했다.
라면 봉투에 힘을 가해 내용물을 두 동강 낸다.
그다음 라면 봉투를 튼 후 건더기 수프를 아직 끓지 않는 물에 넣는다. (나는 라면을 그렇게 배웠다)
뚜껑을 닫은 후 풀어헤쳐진 라면 수프가 임계점을 지나 보글보글 냄비 뚜껑을 쳐낼 때 불을 한 칸 줄인 뒤.
입으로 쏟아 오른 라면 거품을 불어준다.
냄비 안의 온도가 외부 온도에 의해 조금은 잠잠해진 틈을 타 두 동강 난 라면을 넣는다.
두동 간 내고 남은 부스러기를 한 알 한 알 주어 먹는다. (보통은 털어 넣지만, 배가 고픈 나는 늘 그 부스러기를 몰래 훔쳐 먹었다.) 다시 뚜껑을 닫고, 30초를 센다.
그 뒤, 뚜껑을 열고 라면의 면발이 라면 수프에 잘 풀어헤쳐지도록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젓는다.
냄새가 정말 좋다. 라면의 올라는 김에 냉소적인 내 마음이 눈 녹듯 사르르 녹는다.
제일이의 라면을 끓이는 승일은 늘 제일의 라면을 한 두 젓가락 훔쳐 먹는다.
그걸 아는 제일은 늘 먹지 말라고 경고를 하지만. 승일은 그 루틴을 빼먹지 않는다.
여느 때와 같이 승일은 라면 한 젓가락을 냄비에서 건져 내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다.
"후루룩" 소리와 함께 입안 가득 매콤한 향과 밀가루 반죽을 팜유에 튀긴 면발의 보드람이 입안 가득 풍미를 채운다. 라면의 식감은 도저히 이 세상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한 입 먹은 라면을 꼭꼭 씹지도 않은 체 면치기를 한 뒤 4~5번만 씹고 넘긴다.
제일은 라면이 나오는 시간을 귀신 같이 안다.
"야! 빨리 안 가져 오냐!"
"이미 다 익은 거 알아!"
"빨리 가져와 인마!"
승일은 입주면을 손등으로 스윽 닦은 후 냄비 받침을 겨드랑이 끼고, 두 손으로 양은 냄비를 집는다.
뜨거운 양은 냄비는 행주와 쓰다만 수건으로 감싸 집는 게 좋다.
만만의 채비를 마친 뒤,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난다.
그리고, 문턱을 넘어 작은 방으로 라면을 가져가는 찰나, 문턱에 왼쪽 엄지발가락이 걸린다.
비처 무릎을 높게 들지 못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두 손에서 냄비가 빠져나간다.
공중에 양은 냄비의 뚜껑이 해체되어 저 하늘의 새처럼 펄럭 거리는 건 기분 탓이겠지.
공 중부 향한 냄비를 잡으려 냄비에 손을 가져다 듣다가 정말 대었다.
국물과 면이 잠시 손등을 포근히 감싸 안았으며.
"앗 뜨거워!"라는 고통사에 자신들은 그대로 바닥으로 대 동댕이 쳐졌다.
"무슨 소리야!"라고 제일은 물음반 짜증반 섞인 말투로 승일에게 물었지만.
승일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잘난 '제일아 너의 라면이 장판에 팝아트처럼 퍼져 있구나'.
"어어어 아무 일도 아니야!"
"라면 금방 가져다줄게!"
승일은 사건을 수습해야 했다.
'더 이상 면발이 불면 안된다.'
'국물은 어떡하지?'
'엎질러진 물은 못 담지만, 엎질러진 라면 국물은 담아야 하는데!'
행주로 라면 국물을 흡수시킨 뒤 냄비 위로 짜낸다.
약간의 뜨거움의 고통은 감내해야 한다.
인간 살이 본디 인내와 고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흩어진 면발 가닥들 손으로 긁어모은 뒤 냄비에 넣는다.
냄비에 튀긴 국물은 국물을 짜낸 행주로 닦아낸다.
정확히 2분 컷.
"야! 라면 시킨 지가 언젠데!"
"라면 빨리 가지고 와라 좋은 말로 할 때!"
"주워 먹으면 디진다!"
헉!
어떻게 알았지?
라면을 주워 넣은걸?
하지만 난 주워 먹지는 않았으니까 살겠지?!
부랴부랴 라면을 대령한다.
만화책을 같이 보고 있던 친구가 양은 냄비 뚜껑을 연다.
"야이 씨! 라면 다 불었잖아!"
"아놔! 젓가락 두 개 가져왔지?"
"응응 여기에 자"
"젓, 가락!"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은 방을 빠져나갔다.
그날 나는 교훈을 얻었다.
<엎질러진 라면 국물은 주워 담을 수 있다.>
인생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희극일 수도 비극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상황적 일들이 자신을 자꾸만 옭아매고 숨이 막히는 일들이 끊임없이 지속되는데, 어떻게 삶을 희극으로만 바라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