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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NEST RABBIT Oct 14. 2022

커피 프리즌 (COFFEE PRISON)

카페인의 감옥.


카페인의 감옥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남을 위해 운영되는 주방은 창살 없는 감옥이야."

그런 뒤,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행주로 감싸고 주방을 나섰다.




중학교 시절 운동 하는 아들의 의식주(衣食住)를 책임지기 위해 오리와 낙지 삼겹살 집을 카드론과 사채로 시작하신 어머니.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가 먹고 자고 쓰는 그 모든 것이 빚이였다는 것을. 집은 상/하방 한 곳과 창고를 개조한 습기와 바퀴벌레 가득한 판자로 이어만든 가건축물 한 곳에서 살았다. 


거의 6년을 그곳에서 지낸 것 같다. 쥐가 갉아 놓은 A4 용지와 소화제 환 같은 쥐똥이 나뒹굴던 사용하지 않아 잡동사니들로 틀어 막아 놓았던 책상 아래. 난 늘 그곳이 무서웠다. 왠지 그곳에 쌓아 놓았던 잡동사니들을 다 치우면 거대한 바퀴벌래 때와 쥐 그리고 지내가 우글거릴것 같았다. 


정강이 쪽을 따끔거리게 만들며 지나가던 지내. 어깨 위를 간지럽히며 점점 귀쪽으로 방향을 트는 집벌레. 발톱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여러개의 발이 바치 닥터피쉬로 느껴져 잠에서 깨어보니 수백마리의 개미때. 나를 늘 지켜주던 홈키파. 숨을 못 쉬고, 눈이 따끔거리는 것보다 그 화학성분으로 나 이외의 모든 생명체가 별종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틈만 나면 홈키파를 뿌렸다. 


'감옥이 오히려 더 나았을까?' 




커피 프리즌 (COFFEE PRISON)






과연, "커피에 정답이 있을까?"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많은 시행착오와 현실의 벽에 부딪쳐. 아파하고 깨지면서 넘어져 쉬고 싶을 때도 언제나 한 손에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도대체 '이 검은 액체는 나와 어떤 계약을 했기에 내 삶에서 떠나지 않고, 옆에 딱 붙어 있는 걸까?' 아니야, '어찌 보면 내가 커피에 붙어사는 기생충일 수도 있어!', '내가 숙주였던 거야!'. 


반지하를 살아보니, 알겠더라. 정말 LTE 및 와이파이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변기에 앉아 샤워를 해야 하는 낮은 동굴의 높이 같은 집에 살면서(그 집은 200/20에 화장실 높이는 대략 175cm 정도 된다. 참고로 내 키는 184cm이다. 그렇다 키만 크다.) 그 비싼 커피 장비와 스페셜티 커피 생두는 왜 이렇게 바꾸고 구매하는지. 가끔은 회의감이 든다. 


하지만, 늘 주기적으로 때에 따라 만나(manna :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던 도중광야에서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없어 방황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가 하늘에서 날마다 내려 주었다고 하는 기적의 음식.)가 내려오는 광야 (曠野 :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의 삶을 살아가 듯. 


현시대는 때에 따라 신제품 광고와 새로운 생두가 내려오는 신 문명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냥, 침지식으로 커피를 우려먹던 시절이 더 나았다. 아마도 발자크가 단명한 이유는 까맣게 그 흘린 원두를 가루 그대로 40~50잔씩 들이켰으니. 그 숯검댕이 같은 커피가루가 그의 몸에 자극을 주었던 것이 틀림없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로써, 커피로 삶을 연명하다 커피로 삶을 마감한 발자크의 삶을 조금은 돌아봤다. 





오노레 발자크 (Honoré Balzac) 1850년 8월 18일 (향년 51세)





이 사람이 칼로 이룬 것을 나는 펜으로 이룰 것이다!



그는 다작의 대가다. 매일 집에 틀어박혀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마치 수도복 흡사한 긴 옷을 입고 하루에 40~50잔가량의 커피를 마시며(현재의 커피와는 뉘앙스가 완전 다르다. 큰 통에 커피가루를 들이부어 몇 시간이고 계서 끓이며 우려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한 자리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발자크는 20년 동안 97권이라는 방대한 어마 무시한 문장과 책을 남겼다. 그는 1850년이 3월에 한스카 부인과 정약을 약속한다. 한스카 부인은 아마도 조금씩 생기를 잃어가는 발자크의 삶에 동정심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5월 파리로 거주를 옮긴 한스카는 발자크와 살림을 차리지만. 발자크는 이미 와병(病 : 병으로 자리에 누움. 또는 병을 앓고 있음.) 중이었다. 


1850년 안타깝게도 그해 8월 18일 발자크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고, 51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름을 받고 만다. 


오레노 드 발자크가 내 책에 추천사를 써줬다면, 아마도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인간의 삶은 커피로 인해 에너지를 얻고,
커피로 인해 축복의 삶으로 들어간다. 

고로 커피는 신이 인간에게 준 삶의 활력소다. 
교황 클레멘트 8세의 축복이 그대에게.




커피와 시작된 경험_






경험이 주는 삶의 지혜는 수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경험의 내공이 축적된 어르신들이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물론 굳이 살 필요는 없지만 내 삶에 주어진 고통과 고난
그리고 경험의 시간들을 피하려고 하지는 말자.  

“이 또한 지나가리라!” *Hoc quoque transibit!”

<라틴어 수업> 한동일
 




모든 물질은 하나의 실체로 녹아들어 가고,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모든 원리는 우주의 법칙으로 귀환한다. 

모든 기억은 시간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_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커피의 실존적 철학은 녹아드는 물질들의 용해에 있다. 커피 열매 자체로 그것을 하나의 씨앗으로 정의하기엔. 너무 많은 유물론적 증거와 철학 그리고 실존적 사건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인간은 늘 무엇을 정의하고 그 정의 안에 물질과 사건들을 끼워 맞추려 한다. 그래야 그것이 자신들의 생존과 삶에 유익하다 믿으니까. 



나 또한 그랬다. 커피는 하나의 이론과 정답들로 이뤄져 있으며, 유명한 영향력과 외국의 자료들이 그것을 자신들만의 이론으로 정답과 결부시키는 귀납적(歸納) 추리로 이론의 명제가 확률로 치부되어 다수의 사건이 하나의 결과가 도출되면 그것이 정답이라는 방식으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커피라는 요물(物)을 단정 짓는다. 



그래서 내가 이제 것 해온 커피의 기억들이 현재의 과학적 자료와 트렌드라는 시간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인정은 또 다른 도약이다. 하나의 원리가 진리가 아닌 이상. 그것을 계속해서 내 생으로 틀린 것을 맞다는 욕심이 사람을 패망(亡)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패망(敗亡) 하고 싶지 않은 자.

자만하지 말라. 과거의 시간, 미래의 시간.
모든 것은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오직, 현재만이 유일하게 내 삶을 대변한다.
끊임없이 갈구하고, 찾아가라. 

내 삶이 끝날 때까지.



커피를 하며, 삶을 배우고 사람의 관계 속 커피라는 음료가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감사하게도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성립할 수 있었다. 비록,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커피는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한국의 커피 씬(coffee scesne)에서 묵묵히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아직도 커피로 밥을 벌어먹고 살고 있다. 예전에는 커피를 잘하고 싶으면, 물리학과 이과의 책을 읽었지만. 현재 커피를 잘하고 싶다면, 트렌드 2023과 잡지를 많이 읽어야 한다. 사람의 욕구는 자신이 마시는 커피 한 잔에서 격이 느껴지게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일러두기




위의 요소가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논리(論理)적으로 주장할 때는 객관적 요소와 설명을 확실히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커피인으로서 갖춰야 할 제1 덕목이다. 


그리고 커피 불문율은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기! 커피 프리즌의 내용이 자신의 커피 취향을 존중받고 싶어 하는 개인의 커피 생활에 조금의 쓸모를 전해 줄 수 있는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 5분을 기억해.

5분 동안 우리는 말없이 그의 뇌를 파먹었다.
마치, 그 뇌에 있는 기억을 자신에게 옮기기라도 하는 듯.

말 없는 레빗은 그렇게 자신의 기억을 그들에게 공급했다.
그의 눈은 웃음과 울음 그 중간 어디쯤을 표현했다.

레빗의 자식들이 자신의 뇌를 먹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그렇게 커피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자신이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남겨주었다.

_Earnest Rabbit 





아니 뒤신 (Annie Duchesne) 


<빈 옷장>보다는 <사진의 용도>를 더 재미있게 읽었다. 그의 문장은 번역을 거쳐도 스스럼이 없으며 거짓이 없다. 그런 그녀가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남겼던 수많은 말들 중 가장 기억에 남은 문장이 있다. 




체험하지 않은 허구는 쓰지 않는다.



자신이 경험한 삶에서 이야기가 되지 않은 문장이 없을 것 같은 책들.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옭아매는 일들 밖으로 해방했다는 그의 말에서 진실됨의 조건은 아마도 경험이 아닐까? 


시간과 삶의 경계가 어딘지 알지 못하고,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났다. 

여기서 더 신기한 것은 아무도 나의 생사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렇다 난, 살아있다.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아직도 삶을 영위하고 있다. 가끔 커피가 날 살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한 커피를 계속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할 따름이다. 위의 이야기를 본 사람은 나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 뒤신>이 말하지 않았는가. 




계급과 성별에 따른 억압과 차별을 담은 작품을 주로 썼다.
에르노는 대표적인 페미스트 작가로 여성의 낙태권 문제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COFFEE PRISON>


창살 없는 카페라는 감옥에 갇힌 한 사람의 커피인생. 커피 좋아하며, 아낍니다.  

하지만 언젠간 전세계를 다니며, COFFEE ART PERFORMANCER가 될거에요. 

오늘 커피 내일로 미루지 마시고, 오늘도 취향에 맞는 맛있는 커피 드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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