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의 상영 실적이 계속 지지부진하자 그룹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진우는 극장 좌석을 바라보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보다 적은 관객 수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아직 20대이던 시절, 회사를 옮긴 직후 최대표와 함께 매일 이곳저곳의 기업을 돌아다니며 빈손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던 나날 같았다. 정말 오래전의 기억이다. 아스트리드는 기력이 빠진 얼굴로 홀로 떨어져 앉아 있었고, 하야토는 그답지 않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한 듯 극장 밖을 서성였다.
그들 중 유일하게 레이첼만이 다큐멘터리의 가치를 믿으며 끝까지 작은 가능성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엄청난 분량의 서류 뭉치를 검토하고 있었다. 거칠어진 머릿결과 터진 입술을 보면 그녀가 여전히 잠을 거의 자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늘 동료들을 보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우리가 준비한 게 무용지물이 된 건 아니에요. 더 시간을 줘야 할 뿐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는 끝까지 가능한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우리 너무 처지지 말고 계속 움직여 봐요.” 레이첼은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 경청했지만 그녀의 말에 힘을 얻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날 밤 그들은 아지트인 극장 근처의 작은 카페에 다시 모였다. 방향을 잃은 배처럼 그저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만 있었다. 그때, 아스트리드의 휴대전화가 요란한 소리로 울렸다. 그녀는 무심코 화면을 확인하던 중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게... 무엇이지?” 아스트리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휴대전화를 들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리사의 짧은 영상이 떠 있었다. 영상 속 리사는 다큐멘터리의 대사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모두가 족히 수십번은 넘게 본 다큐멘터리 후반부의 한 장면이었다. “너무 늦기 전에 모든 걸 바꿔야 해.”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그 말은 리사의 독특한 말투와 억양으로 표현되었다. 빠르고 끊어지는 발음, 단어 사이를 날카롭게 끊어 말하는 그 말투는 사실 미래의, 2050년의, 어린 소녀들의 일반적인 그것이었다.
2040년대 후반부터 젊은이들 사이에서 반항과 저항, 포기와 조소를 담은 독특한 말투가 유행했다. 아니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말투라고 누군가 해석을 했고, 어느 순간 모두가 그냥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아무려면 어쩌랴. 리사는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그 말투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2025년,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 말투가 몹시 기이하고 신선한 충격으로 흥미롭게 다가온 것이다.
SNS를 중심으로 리사의 영상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리사의 말투는 다큐멘터리의 맥락을 넘어 빠르게 밈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리사의 말투를 따라 하며 짧은 영상을 찍어 올렸고, 인스타그램과 틱톡, X는 ‘리사 챌린지’로 도배되었다. “너무 늦기 전에 바꿔야 해.” “더 기다릴 수는 없어.” 같은 단순한 문장들이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또한 묘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마저 리사의 말투를 흉내 내며 즐겼다.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에서도 저마다 리사의 말투를 따라 했고 다양한 문장과 포즈도 생겨났다.
진우는 이 현상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거야?” 그는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퍼져나가는 상황을 지켜봤다. 다큐멘터리의 본질과는 다르게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레이첼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지만,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리사의 말투가 그들에게는 상징이 된 거예요. 그냥 재미있는 현상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진심이 닿은 걸지도 몰라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어요”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감상적인 해석이었다.
당연하게도 리사의 말투는 곧 상업화되었다. 대형 브랜드들이 리사의 말투를 이용한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늦기 전에, 당신의 인생을 바꿔라!” “지금 당장 더 나은 선택을 하세요!”라는 슬로건과 함께 리사의 말투를 흉내 낸 광고 모델들이 각종 상품을 홍보했다. 곧이어 리사를 직접 인터뷰하고 싶다는 세계 각지의 언론사와 광고 모델로 계약하기를 원하는 기업들의 연락이 그룹에 쇄도했다. 특정 잡지에서는 현 시점에서 리사의 상업적 가치를 유명한 축구 선수보다 더 높게 추정하기도 했다. 진우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 이런 리사 현상을 활용하고 증폭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야토는 그런 광고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리가 원했던 게 이건 아니잖아. 이건 전부 상업적인 쇼잖아.” 말하며 그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리사의 문장과 말투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의미가 점점 희석되고 오용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리아는 하야토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가 원했던 변화의 방식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요. 사람들이 그냥 재미로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녀는 실망감에 떨리는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노력이 그저 유행처럼 소비되는 현실에 큰 실망을 느꼈다.
레이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것이 이 시대가 무언가에 집중하고 그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방식이다. “지금 흐름이 바뀌고 있어요.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을 조금만 우리 쪽으로 돌릴 방법을 찾아야 해요. 이건 우리에게 온 엄청난 기회에요. 너무나도 감사한 기회입니다.” 레이첼은 빠르게 변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진 우는 레이첼의 말에 동의하며 마케팅 전문가와의 협력을 통해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그는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을 알리기 위해 인터뷰와 기고문을 작성하며 리사의 말투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변화를 바라는 동시대인 모두의 염원 표출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SNS에서는 리사의 말투를 따라 하는 챌린지를 다큐멘터리의 핵심 메시지와 연결하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동시에 리사에 대한 대중들의 궁금증과 신비감, 그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는 “리사는 이제 곧 우리 앞에 나타날 겁니다” 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이용했다.
아스트리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게 정말 맞는 걸까?’ 그녀는 소셜 미디어를 보며 수많은 사람이 리사의 말투를 따라 하는 영상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영상들이 과연 다큐멘터리가 전하고자 했던 진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 대한 각자의 해석과는 무관하게 리사에 대한 관심은 곧이어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조금씩 증가하더니 이제는 기하급수적으로 관객이 늘고 있다. 엄청난 흥행이다. 이런 흥행 추세에 맞춰 많은 비평가의 영화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그저 손바닥 뒤집기였다. 리사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고 있었고 아스트리드는 천재 감독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단순한 유행을 넘어 다큐멘터리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는 듯 보였다. 리사의 말투는 더 이상 가벼운 밈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절실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즉각적인 행동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리사의 이야기는 대중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고, 기후 변화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에 대전환의 물결을 일으켰다.
진우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가 해냈어. 진짜로 해냈다고.”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되돌아와 있었다. 모두가 환호했고 하야토도 엷은 미소를 지었다. ‘리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녀의 목소리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고 이제는 호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리사는 알고 있을까? 이 사실을 안다면 그녀는 기뻐할까?’
레이첼은 그들의 성공이 단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길 바랐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에요. 사람들의 관심을 행동으로 끌어내는 게 우리의 진짜 목표니까요.” 그녀는 팀원들에게 끝까지 변화를 위한 각자의 노력을 멈추지 말 것을 다짐시켰다. 그녀는 동료들에게 종이를 나눠 주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그렇게 두껍지 않은 문서였다. 거기에는 2000년대 이후에 발생했던 수많은 유행과 사회적 이슈, 그리고 그것들의 지속 기간과 영향, 현재 시점에서의 의의 등을 분석한 자료였다. 모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미스 노이만은 그런 동료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건배를 제의했다.
다큐멘터리의 성공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이들에게 찾아왔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 또한 발견했다. 그룹은 다시금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했다. 그들이 과거로 돌아온 이유는 단순한 유행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닿아 진정한 변화를 완성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기 위해 여기에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이제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닌, 이 시대의 정신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 큰 변화를 만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아스트리드는 리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는 리사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닿았음을, 그리고 그들이 함께 꿈꿨던 미래가 점점 현실이 되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다음 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변화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