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은 화상을 통해 리사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다. 리사와 하야토를 제외한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타임머신은 거대한 금속의 덩어리처럼 숨죽인 채 대기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기계는 차갑고, 위협적이며,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들 앞에 서 있었다. 다섯 주인공들은 타임머신의 입구 앞에 나란히 섰다. 각자의 얼굴에는 긴장과 결의가 엿보였고, 그들은 이제 곧 자신들이 내린 결단의 무게를 마주하게 되리라.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선택한 이들은 각자의 자리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첼은 마지막으로 컴퓨터를 확인하며 타임머신의 설정을 점검했다. 목적지는 2025년, 그들이 태어나고 자랐던 곳이다. 한때 희망과 미래가 가득했던 그곳으로의 귀환은 이제 과거를 되돌리기 위한 마지막 기회였다. 그들이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바로 그곳이다. 레이첼은 깊은숨을 내쉬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계기판을 만지작거리며 동료들을 돌아봤다. 각자의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조인 그들은 서로에게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진우는 레이첼과 시선을 교환하며 미소 지었지만, 그 이면에는 감출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스트리드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기도했다. 알리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고, 하야토는 화가 난 듯한 예의 표정으로 마지막으로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리사의 미소가 눈앞에 계속 아른거렸다.
타임머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속성의 윙윙거림이 점점 커지며 이들의 몸을 감쌌다. 모든 것이 빠르게 회전하는 듯한 감각이 들었고, 무한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짧은 순간 동안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길 위를 달렸다. 한동안의 정적, 그리고 갑작스러운 낙하감이 그들을 엄습했다. 그 순간, 주인공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강한 중력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고, 숨조차 가빠졌다.
타임머신이 멈춘 곳은 2025년의 어느 평범한 거리의 한구석이었다. 세상이 멈춘 듯한 감각을 뒤로하고 그들은 다시 현실 속으로 떨어졌다. 순간의 혼란 속에서 서로를 확인한 이들은 모두 무사히 착륙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이상한 감각이다. 한때 익숙했던 풍경,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쏟아지는 햇빛. 모든 것이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 보였다. 레이첼은 아주 잠깐 동안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녀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결국 그녀가 옳았다. 대다수가 그녀를 조롱했지만, 미스 노이만이 옳았던 것이다.
"우리가 정말 돌아온 거예요?" 알리아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녀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시의 소음과 냄새, 햇볕의 따뜻함이 피부에 와 닿았다. 그리운 향수와 동시에 그 안에 담긴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그녀는 2025년의 공기가 이렇게 상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그래, 돌아왔어." 진우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운 냄새, 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며 각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진우는 그 속에서 기묘한 고독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익숙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상념에 빠지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모습을 점검했다. 과거의 누구도 알아볼 수 없도록 성형 수술과 변장을 마친 상태였다. 진우는 자신의 새로운 얼굴을 창문에 비춰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곳에 더 이상 박진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도 그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했고, 그 누구도 그의 과거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누구인가?’
하야토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이곳은 그가 알던 세상이었지만, 동시에 너무도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에는 소음이 가득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로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하야토는 차가운 바람을 느꼈다. 이곳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실감이 안 나요." 알리아가 말했다. 눈앞의 세상이 너무나도 생생해 보여, 마치 시간이 모두 잘못된 것만 같았다. 그녀가 알던 2050년의 참상은 이곳에서는 그저 막연한 환상에 불과했다. 자신이 정말 2050년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2025년에서 2050년의 꿈을 꾼 것인지 잠깐 헷갈렸다. 갑자기 알리아는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아랍인을 죽였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그 생각은 한동안 그녀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알리아는 땅에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도로 가장자리에 있는 흙을 만져보았다. 차갑고 촉촉한 느낌. 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뫼르소를 잊고 아프리카의 초원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아직 사막으로 변하지 않은 그 시절. 그녀는 눈을 감고 그때의 풍경을 상상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이곳의 모습과 미래의 황량함이 겹쳐 보였다. 크게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그래 한번 해보자.’
레이첼은 그들을 보며 잠시 멈춰 섰다. 그녀는 모두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선택한 결정의 무게를 다시 한번 느꼈다. 이들은 과거를 바꾸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러나 그 희생이 과연 보상받을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타임머신이 있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것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떠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칼카스는 아킬레우스가 없다면 그리스 군은 트로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신탁받았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고 결국 그리스에 승리를 가져왔지만 다시는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그룹은 도시의 중심부를 향해 걸어갔다. 그들의 머릿속은 다큐멘터리를 세상에 소개할 계획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감과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많은 정보를 습득했지만, 기억과는 다르다. 그들이 알고 있던 2025년에 대한 감각은 이미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이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사람들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진우는 고개를 들어 빌딩 숲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그리웠던 광경이 그의 눈앞에 분명한 현실로 준비되어 있었다.
하야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도시의 한복판을 걸어갔다. 그는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곧 직면하게 될 미래의 위험을 상상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아직 모르는 것들이었다. 그는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여기로 돌아왔지만, 과연 그의 선택이 옳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다 더 이상 이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계획한 일만 계획대로 진행하면 될 터이다.
알리아의 눈에 잎이 무성한 길거리의 나무들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 나무의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벅찬 감격을 느꼈다. 처음으로 과거로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그들이 다시 모인 곳은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기로 한 극장 중 하나였다. 영화계 관계자들은 이들을 오랜 기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한 작품을 준비한 베일에 싸인 다큐멘터리 제작 그룹으로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누구도 그들의 진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의 과거 경력을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 해 보았지만 아무 데서도 그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대번에 그들의 다큐멘터리가 매우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은 작품과 새로운 얼굴은 관객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조합 중 하나이다.
진우가 주요 영화제와의 협력을 끌어냈다. 다큐멘터리가 주요 영화제에 초청될 수 있도록 조율했다. 자신들의 영화를 홍보하며 관계자들의 도덕성과 부채 의식을 교묘하게 건드리기도 하였다. 세계적인 평론가 두 사람에게는 은밀히 뇌물을 주었다. 그 평론가의 우호적 평가가 실린 기사를 보며 진우는 녹색 채권을 발행할 때 느끼지 못했던 보람과 희열을 느꼈다.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아버지가 계셨었다면 내 행동을 선하다고 평가하셨을까?” 진우의 전략은 간단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다큐멘터리를 노출하고,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 그는 수없이 많은 회의와 협상을 통해, 다큐멘터리를 상영할 스크린을 확보해 나갔고, 대규모의 언론 보도와 인터뷰도 능숙하게 진행해 나갔다.
아스트리드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 트레일러와 예고편의 다양한 변주를 계속 제작하며 다큐멘터리의 감정적인 면을 강조하려고 했었다. 그녀는 리사의 모습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고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장면들을 골라냈다. 트레일러는 소셜 미디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고, 사람들은 점점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스트리드는 이 영화가 단순한 경고가 아닌, 실제로 사람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임을 계속 강조했다.
동료들의 노력과 조그마한 결실을 지켜보며 레이첼은 조금 더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잘 되는 부분보다는 잘되지 않는 부분에 집중했고, 과거로 오기 전 그들이 계획했던 여러 일들의 진척 상황과 장애 요소, 앞으로의 전망 등을 꼼꼼히 따지며 매일 조금씩 계획을 수정했다.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변수들과 그 가능성을 따져보며 대비하고 사전에 제거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하루에 서너시간 밖에 자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었지만, 미스 노이만은 절대로 지치지 않았다. 커피 속 카페인이 그녀를 응원하며 도와주고 있었다. 2025년의 커피는 정말 최고였다.
시간이 흐르며 다큐멘터리는 점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디기는 했지만, 관심도가 꾸준히 올라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준비는 결실을 거두어갔다. 다섯명은 지쳐있는 서로를 격려하며, 다큐멘터리의 첫 상영일을 기다렸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사람들이 리사의 이야기를 보고 변화하는 것. 그들이 이 과거에서 시작한 여정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자신들을 도우러 과거로 올 사람도, 그들이 다시 미래로 돌아갈 수 있는 길도 이제 없었다. 이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었다.
상영일이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한편으로는 긴장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근거렸다. 이제 이 모든 것이 세상에 공개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 모든 노력이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들의 눈에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과거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미래를 써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