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이상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그룹은 다시 모였다. 그들은 단순한 아이디어를 넘어서, 실제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을 내딛기로 했다. 그 과정의 중심에는 지구와 인류의 생생한 고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이 영화는 기후 변화 그리고 행동의 최선의 무기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회의가 열렸다. 레이첼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프로젝트 계획서를 펼치며 입을 열었다. 그 엄청난 두께를 통해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노력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다웠다. "우리가 만든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끌어내야 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강력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가장 최신의 심리학 연구를 참조하고, 역사적으로 성공한 주요 종교 단체가 어떻게 신도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분석했고 다양한 사례를 많이 활용했습니다."
아스트리드는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의 고민을 말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충격적인 무언가가 필요해요. 그저 지구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얘기만으로는 부족할 거예요. 그들은 이미 그런 이야기들에 무뎌졌으니까요. 우리는 그들 눈앞에 처절한 비극을 보여줘야 하고, 그 비극은 가능한 한 인간적이고 가장 사실적이어야 합니다.”
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우리의 다큐멘터리에는 인류가 공감하고 감정이입 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할 것 같아. 그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함께 아파하고 우리의 메시지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레이첼은 기다렸다는 듯 컴퓨터를 켜고, 준비해 둔 영상 파일을 재생했다. 화면에서 한 소녀가 나왔다. 깡마른 몸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커다란 눈동자가 그녀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묘하게 아름다운 소녀, 그녀의 이름은 리사였다. 리사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재난 속에서 잡초처럼 살아남아 꽃이 된 소녀였다. 계속 바라보게 하고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 이상한 감정을 불러오는 소녀였다. 모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그들이 찾던 바로 그 무언가라고.
리사는 여러 차례의 홍수와 가뭄, 그리고 무너진 사회 시스템 속에서 고아가 되었다. 영상 속에서 리사는 낡은 건물의 폐허 속을 걷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무너진 집들과 부서진 가전제품들이 널려 있었고, 사람들은 거리에서 생활하며 음식과 물을 찾아 헤맸다. 리사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저는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여기서 친구들이랑 같이 지내고 있어요. 학교는 없어졌고, 아프면 그냥 참아요. 약도 없고, 의사도 없으니까요.”
리사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외로움과 슬픔이 배어 있었다. 화면이 전환될 때마다, 그녀의 일상은 점점 더 비극적으로 변해갔다. 길거리에서 집 잃은 개를 돌보는 모습,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을 찾는 장면, 그리고 어둠 속에서 혼자 울고 있는 모습.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모두를 아프게 했고, 또 모두를 들뜨게 했다. 하야토는 이 상황이 불편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찾던 바로 그 인물이에요.” 아스트리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리사의 이야기는 너무도 비극적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거죠. 사람들은 이 소녀를 보고 함께 아파할 것이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겁니다.” 진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사와 같은 사람들은 숫자나 통계로 표현할 수 없는 기후 변화의 진짜 얼굴입니다.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이 그토록 외면해 온 진실을 보여줄 수 있어요.”
리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다큐멘터리의 기획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레이첼과 아스트리드는 리사의 삶을 기록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레이첼과 아스트리드, 하야토가 먼저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리사가 머무는 폐허 속으로 찾아갔다. 하야토의 도움을 받아 촬영 장비를 챙기고, 리사의 하루를 따라다니며 그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아내기로 했다.
촬영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리사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레이첼의 극진한 간호에도 그 고열은 일주일 넘게 지속되었고 리사도 그룹도 많이 지쳤다. 리사는 처음에는 카메라를 매우 불편해했고, 그룹과도 거리를 두려 했다. 그러나 아스트리드의 끈기와 따뜻함 덕분에, 리사는 점점 그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녀는 점차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촬영 팀은 각자 다른 역할을 맡아 협력했다. 진우는 재정과 일정을 관리했고, 하야토는 현장 관리와 안전을 책임졌다. 그는 리사가 지내고 있는 곳의 안전을 확인하고, 촬영 도중 일어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을 점검했다. 그럼에도 수시로 도난이나 여러 시빗거리가 생겼고 그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툼과 협상을 마다하지 않았다. 리사는 하야토에게만 차가운 얼굴 뒤에 숨겨진 신비한 미소를 가끔 보여주었다.
알리아는 리사의 이야기가 단순히 비극적 요소로만 소비되지 않도록, 그녀의 일상에서 발견되는 희망의 순간들을 포착하려 애썼다. 그녀는 리사가 길거리에서 작은 꽃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집중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고, 그녀가 다른 고아들과 함께 작은 텃밭을 가꾸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이 순간들은 영화 속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단순히 비극만이 아닌, 그 속에서도 여전히 피어나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이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메시지였다.
그룹은 여러 차례 토론과 고민 끝에 과장이나 인위적 연출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립했고 이를 지켰다. 진우는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다. 필요한 기획과 각색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지만, 나머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리사에게 촬영 외에 다른 도움은 주지 않기로 했다. 마음은 아팠지만, 비극적 요소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레이첼은 촬영된 자료들을 분석하고, 편집과 구성에 집중했다. 그녀는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단순한 경각심이나 일회적인 슬픔의 감정을 넘어, 지속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녀의 편집 작업은 치밀하고 꼼꼼했다. 리사의 얼굴 하나하나, 그녀의 말투,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가진 의미를 최대한 살려내려고 노력했다. 아스트리드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꼼꼼한 작업이었다. ‘레이첼을 일찍 알았더라면 베니스에서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혼자 피식 웃기도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촬영 중간중간 리사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혼자 울고 있는 장면을 보며, 아스트리드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오랫동안 그녀를 안아주었다. 리사는 매번 아주 오랫동안 울었다.
촬영이 끝나갈 무렵, 그룹은 모여 지금까지 촬영하고 편집한 다큐멘터리의 초안을 함께 검토했다. 그들은 각자의 의견을 나누며 다큐멘터리를 조금씩 다듬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의견 충돌도 발생했다. 알리아는 다큐멘터리가 너무 비극적이라는 의견을 내놓았고, 보다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레이첼은 오히려 현실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맞섰다. 그들의 의견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두 사람을 중재하였고, 비극과 희망을 교차하며 극적인 느낌을 강조해 나갔다. 결국 좋은 영화보다는 충격적인 영화, 논란을 불러오고 논쟁을 만들고 분노하고 결국 사람들이 움직이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여운의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다큐멘터리의 최종 편집이 끝나고, 그룹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그들은 다큐멘터리가 과거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사전 준비 작업에 온 힘을 쏟았다. 다큐멘터리를 성공적으로 상영하고 흥행시키기 위한 준비와 함께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준비도 했다. 성형 수술을 통해 외모를 바꾸고, 새로운 신분을 마련했다. “생각도 못 했는데 더 젊어지고, 더 예뻐지니 너무 좋은데요” 알리아는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려 한층 과장되게 떠들었다. 그룹은 서로의 달라진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며 자신들이 하는 일의 무게를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큐멘터리를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배급과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 진우는 2025년 당시의 영화 시장을 분석하며, 가장 효과적인 배급 방법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는 우선 주요 영화제에 다큐멘터리를 출품하고, 유명한 영화 평론가들과의 인터뷰를 주선하기로 했다. 그는 다큐멘터리가 단순히 영화로 소비되는 것이 아닌, 사회적 이슈로 끌어올리기 위해 언론과의 긴밀한 협력을 할 수 있는 방안도 계속 고민했다. 동료들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영화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위법적인 행동이나 어떤 검은 거래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더러운 일은 모두 그가 감내할 것이다.
하야토는 초기 상영 스크린 수를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방법에 몰두했다. 그는 각국의 주요 도시와 지방 소도시까지 다큐멘터리가 상영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계약을 성사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분야였지만 주위의 조언을 구하며 우직하게 최선을 다했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혼자 남게 될 리사가 계속 생각났다.
아스트리드는 다큐멘터리의 다양한 트레일러를 제작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한 강력한 광고 전략을 구상했다. 그녀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활용해 다큐멘터리의 충격적인 장면들을 먼저 공개하며,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기대를 증폭시킬 심산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그다음엔 진지한 관심으로 다큐멘터리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레이첼은 영화에 대한 과학적 신뢰성을 보강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와 협력했다. 그녀는 기후학자, 생태학자, 지질학자들을 초대해 다큐멘터리의 과학적 근거를 설명하는 영상을 함께 제작했다. 이 영상은 다큐멘터리 상영 후, 논란이 심화하는 시기에 배포되어 특별히 상영되고, 관객들에게 영화의 메시지가 단순한 상상이 아닌 가까운 미래에 발생할 현실이 될 거라는 무서운 사실을 알려줄 도구이다.
이제 그룹이 구상했던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어간다. 그래도 레이첼은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무엇인가 중요한 부분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안감이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