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우는 사무실 창가에 서서 회색빛으로 물든 서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깥 풍경은 초현실적일 만큼 뿌옇고, 그 속에는 지루함과 무관심이 뒤섞여 있었다. 하늘은 더 이상 맑지 않았고, 건물들은 먼지에 덮여 본래의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잠시 시계를 보았다. 9시 45분. 아직 10시가 채 되지 않은 아침인데도, 공기는 이미 숨이 턱턱 막힐 듯 무거웠다. 진우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더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쌓여 있는 종이들은 오늘 하루를 채울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각종 수치와 그래프, 사인과 결재란이 빼곡히 박힌 문서들. 수년째 비슷한 일상이다. 멀리에서 바라보면 반복되는 하루를 보내고 있으나 그는 분명히 조금씩 성공하고 또 성장하고 있다. 자기 자신도 주변에서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특별한 고민도 없었고 조그마한 균열의 징조도 없었다. 적어도 지난 10년간은.
진우는 독일 최대 투자은행 서울지사의 DCM(Debt Capital Market, 부채 자본시장) 부서에서 일하는 엘리트 뱅커이다. DCM 부서가 하는 일은 주로 기업들이 채권을 발행해 대규모 외화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그의 고객들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이나 대형은행이다. 매일같이 전화 회의와 서류 검토, 고객들과의 미팅을 반복하며 그는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는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늘 분주하고 빠듯하고 비슷한 스케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편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든 탓이리라.’
몇 달 전부터 그는 사소한 변화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그의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 듯하다. 평소보다 더 세게 느껴지는 휴대전화의 진동, 여름에도 사라지지 않는 뿌연 하늘, 사람들 사이에서 스며 나오는 짜증 섞인 대화들. 그는 늘 바빴기 때문에 그동안 이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까? 이런 불편감은 점차 그의 일상에서 조금씩 크기가 커지는 작은 돌처럼 자리를 잡아갔다.
그의 아버지가 교수직을 제안받으며 진우의 독일 생활도 시작되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그의 아버지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고, 유능한 인간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한 대학의 제안에 하루도 채 고민하지 않았다. 철학과 교수였으나 삶의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고민이 길지 않았다. 철학이 부재한 철학자의 결정이랄까.
독일에 가보니 진우는 매우 왜소한 아이였다. 독일어와 축구를 잘하지 못하는 그에게 친구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호의적이지 않았다. 진우는 축구에는 끝까지 흥미를 느낄 수 없었지만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독일에서 지냈다. 그는 말수가 적은 성실한 학생이 되었다. 아버지와 달리 그는 오랜 시간 고민했고 대학은 독일이 아닌 한국의 명문대를 재외국민 자격으로 입학했다.
학생들 간의 끈끈함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과 길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고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왔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공부를 계속하라는 조언과 제안을 끈질기게 받았지만 수차례 거절했다. 세계적인 투자은행에 인턴으로 입사해 능력을 보여주었고 곧이어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금융인의 삶이 시작되었고 자신을 보면 늘 두 눈을 모두 감고 이상하게 윙크하던 후배와 결혼도 하였다.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팀장님, 저희 홍콩 ESG(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 개선을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경영 패러다임)팀과 이야기해보고 최대한 빨리 연락드리겠습니다. 결국 논리를 어떻게 만드느냐의 문제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진우는 회의실로 들어가면서도 끊임없이 전화를 걸었다. 요즘 그의 업무는 주로 ESG 분야 특수 채권 발행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가 속해있는 독일계 은행은 자타공인 녹색금융의 선두 주자이다. 사무실에서 일회용 컵을 쓰지 못하게 한 세계 최초의 기업이기도 하다. ESG라는 단어가 처음 그의 업계에 등장했을 때, 그는 이것이 그의 성공의 발판이 될 것이라고 전혀 알지 못했다.
처음 입사한 미국계 은행은 업계 1, 2위를 다투는 곳이었다. 회사의 주니어로서 그는 매일 제안서를 쓰고, 고객사의 PPT를 만들었다. 평일 야근은 물론이고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까지 일했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최대표를 만났다. 최대표는 진우가 일하는 곳의 라이벌 은행에서 얼마 전 독일계 은행으로 옮겼고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대표가 되었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을게. 지금 너한테 아무도 관심이 없지만 나는 네가 나와 일할 최선의 파트너라고 생각했어. 독일 병정 같다고 해야 할까? 너의 그런 모습이 계속 눈에 들어왔어. 같이 일하자.” 최대표의 제안에 하루도 채 고민하지 않았다. “이건 철학이 부재한 결정일까? 아버지도 이렇게 독일에 가셨을까?”
이 업계에서 이직은 매우 빈번히 일어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한국 시장에서 독일 은행이 최대표과 무명의 진우 두 사람의 조합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시장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진우가 회사를 옮겼을 때 회사의 업계 순위는 18위였다. 고객사를 찾아가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최 대표님 잘하시는 것 알고, 기회를 드리고 싶은데 내부 규정상 상위 10개 사 중에서만 선정할 수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암튼 다른 데 가셔서 많이 실적 쌓으시고 꼭 10위 안에 들어오십시오, 저희가 제일 먼저 선정해 드리겠습니다.” 였다. 최대표와 진우는 매일 고객사를 찾아가고 제안서를 업데이트하고 전화를 돌리고 시장 상황을 브리핑하고 골프를 쳤다. 매주 거의 쉬는 날 없이 일하고 모든 가능성에 말 그대로 최선을 다했다. 고객들이 자신들에게 점점 더 호의적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실적으로 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유럽의 이상고온이 지속되었고 이와 함께 기회의 문이 열렸다. 많은 투자자가 ‘녹색 채권’(재생에너지 등 친환경 프로젝트나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과 같은 기후 변화에 기여하는 특수채권 투자 비중을 높이기 시작했다. 독일 본점도 이 기회를 빠르게 눈치챘고 전담 조직과 플랫폼을 구축했다. 최대표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한 국책은행과 한국 최초의 녹색 채권 발행에 성공했고 그 뒤로는 바쁜 일상의 반복이었다. 진우의 회사는 이제 안정적으로 업계 3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 사이 진우는 박 상무가 되어 있었고 ‘독일 병정’이라는 별명과 함께 업계의 거물이 되어 있었다.
“대표님, 통화 괜찮으세요? 하나파워에서 이번 공모는 녹색 채권으로 발행하고 싶다고 합니다. 동해 쪽으로 해상풍력 건설 프로젝트가 이사회 통과가 확실한가 봅니다. 홍콩 애들 쪼아서 빨리 답변받고 서류랑 계약서 준비 시작하겠습니다. 런던 분위기는 좀 어떠세요?”
진우는 전화를 끊고 나서 창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의 얼굴이 반대쪽 창에 반사되어 일그러져 보였다. ‘바람 좀 쐬고 오자.’ 빌딩 사이로 보이는 나무들은 초록빛을 잃고, 마치 색이 빠져나간 듯 회색 조로 변해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느껴지는 공기는 답답했다.
그는 또 다른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길이 무겁게 느껴졌고, 화면에 펼쳐진 수치와 그래프는 그저 무의미한 기호들처럼 보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그는 그 질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갑자기 술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 그는 회사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잠시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다. 멀리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흐릿하고, 그 흐름 속에 마치 모든 것이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해 생각했다. 독일로 가기 전 그때의 서울은 지금보다 맑고, 하늘은 파랗고, 계절마다 바뀌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아니 과거는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윤색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독일 군인들은 바로 무엇을 했을까?
진우는 점심시간이 끝난 후 다시 업무에 몰두하려 했지만, 창밖의 풍경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직원들이 모여서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그들은 환율과 금리, 다음 주식 투자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진우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생기지 않았다. 역시 술이 문제일 것이다.
그는 저녁 마지막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택시 안, 진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같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이대로 괜찮을까?’ 그는 자신에게 수없이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갑자기 자기에게도 아이가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사이 택시가 집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