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숫자와 일정으로 머리를 채우던 사람이었다.
캠페인 일정표, 퍼널 구조, 콘텐츠 캘린더,
성과 지표가 나를 설명하는 가장 손쉬운 언어였다.
“나는 마케터입니다.”
그 문장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벽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삶의 결을 바꾸는 결심을 했다.
마케터에서 여행자로.
정체성을 다시 짓는 일은
직함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섬세한 변화였다.
직업이 아니라 ‘호흡’을 바꾸는 과정
처음에는
일하는 속도가 느려지는 게 불안했다.
세상은 여전히 빠르게 스크롤되는데
나만 멈춰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일을 멈춘 것이 아니라
다른 리듬으로 살아보는 중이라는 걸.
마케팅에서 성공의 기준이
전환율과 도달률이었다면,
여행에서 성공의 기준은
감각과 존재감이었다.
오늘 내가 느낀 햇빛,
새 도시에서 눈을 뜬 순간의 설렘,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 천천히 미소 짓는 법.
지표 대신 감정,
성과 대신 경험으로 하루가 채워졌다.
분석하던 눈으로, 이제 관찰하기
마케터일 때 나는
“왜?”를 찾아 세상을 쪼갔다.
데이터, 니즈, 페인포인트.
여행자가 된 나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여유롭게 늦잠을 자는 도시,
바쁜 걸음보다 대화를 선택하는 거리,
카페에서 혼자 책 읽는 이방인의 여유.
마케터의 관찰은 분석이었고
여행자의 관찰은 존중이었다.
둘 다 필요한 능력이지만
세상을 보는 마음의 깊이는
조용한 관찰에서 자란다.
‘브랜드’가 아닌 ‘내 이야기’ 만들기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글을 쓰던 시절,
문장은 날카롭고 목표가 분명했다.
지금 나는 설득 대신 기록을 택한다.
누군가를 움직이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움직인 흔적을 남기기 위해.
기획서 대신 여행 노트,
KPI 대신 감정의 키워드.
어쩌면 마케터는
삶에서도 계속 결과를 요구했고,
여행자는 과정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변화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겹쳐지는 것이다
마케터에서 여행자가 되었다고
전자가 지워진 건 아니다.
데이터를 읽던 눈은
이제 도시의 리듬을 읽고,
사람을 설득하던 마음은
이젠 나 자신을 설득해
조급함을 내려놓는다.
정체성은 갈아입는 옷이 아니라
겹겹이 쌓이는 층이라는 걸
뒤늦게야 깨닫는다.
마지막 문장
마케터에서 여행자로.
이 변화는 직업의 이동이 아니라
삶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었다.
성과 중심에서 감정 중심으로,
속도에서 리듬으로,
증명에서 경험으로.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정체성을 바꾼다는 건
새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초대하는 일이라는 것을.
다음 정체성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게 자연스럽다.
이제는 안다.
좋은 삶은 직함이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숨 쉬는 방식이 만든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