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그 무슨 의식이 아니다. 절실한 인간의 기록일 뿐.”
세계 속에 한국 단색화 미학을 대표해 온 윤형근(1928-2007)의 개인전 <윤형근/파리/윤형근>이 지난 2일 공개됐다. <윤형근의 기록> 전에 이어 PKM갤러리에서 3년 만에 선보이는 개인전이다. 작가가 1980년대 초반 파리에서 1년 반가량 체류하며 몰두했던 한지 작업과 장 브롤리 갤러리(Galerie Jean Brolly)에서의 2002년 개인전 준비 차 3개월간 레지던스에서 머무르며 과감히 표출해 낸 대형 캔버스 작품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의 파리 시기 전후 작업이 두루 포함되었다. 도시와 인연이 깊은 거장의 개인전은 작년 큰 호응을 얻은 파리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 개인전에 이어 1924 파리 올림픽 이후 100주년을 맞이하는 2004 파리 올림픽 대회를 앞둔 현시점에 개최되어 눈길을 끈다.
1928년생인 윤형근 화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뒤잇는 이데올로기 대립, 독재정권은 불의에 고개 숙이거나 침묵하지 않던, 올곧은 성품의 작가에게 죽을 고비를 비롯해 여러 차례 복역의 수난을 안겼다. 5.18 민주화운동으로 말미암은 시대의 아픔을 다시 마주하며 분노하고 좌절한 그는 한국을 떠나 1980년 12월 파리로 향한다. 그곳에서 작가는 1970년대 이래 탐구해 온 자신의 그림 명제에 한층 천착한다.
하늘을 닮은 '청색(Ultramarine)'과 땅을 빗댄 '다색(Umber)'을 섞어 빚은 청다(靑茶)색으로 기둥을 그려 문(問) 형상을 띠도록 스며들고 번지게 한 작업은 윤 화백이 ‘천지문(天地門)’이라 명명했던 작품 세계를 이룬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재조명된 한지 작업은 한국 고유의 재료에 작업 의도를 보다 섬세하고 세심하게 구현해 낸 윤형근 회화의 정수를 담은 것이라 더욱 뜻깊다. 윤 화백은 하늘과 땅이 공존하는 검은 기둥을 무수히 내리그으며 도달한 밀도 깊은 물성 사이에, 유(有)와 무(無)의 차원을 넘나드는 자신의 회화 어법이 지닌 독자성과 보편적 감수성에 확신을 가지고 귀국하게 된다.
화백의 두 차례에 걸친 파리 시기와 그 전후를 중심으로 20년에 달하는 예술적 진화를 탐색한 이번 전시는 표면에 닿는 순간 유화 물감을 잔잔히 흡수하여 따뜻하고도 포근한 느낌을 자아내는 한지 위에 그린 작품 15여 점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한지와 대형 캔버스 작품이 조우해 자아낸 신선한 시각으로 윤형근의 작품 세계를 살펴볼 소중한 기회다.
파리 시절 한지 위에 작가가 그린 한 폭의 시, 세월을 품은 작품들은 기존 캔버스 작품과 달리 작가의 서명이 앞쪽에 자리한 것을 볼 수 있다. 군사독재 시대 이방인으로 살며 자신의 이름과 그린 연도, 이국 객지의 도시명을 전면에 적어 내려가며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2층으로 올라가면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정갈한 글씨체로 남긴 기록 아카이브와 사진들, 살아생전 인터뷰 영상을 만나볼 수 있다. 1974년부터 작고 3년 전인 2004년까지 반세기에 이르는 유구한 세월, 방대한 시간 틈틈이 쓴 글을 엮어 PKM books에서 발행한 '윤형근의 기록' 서적 또한 비치되었다.
1974년 8월 6일 책자 속 기록이 시작되는 첫 장에서 46세의 작가는 “예술은 그 무슨 의식이 아니다. 절실한 인간의 기록일 뿐”이라고 했다. 백발의 노장이 된 1990년에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아주 짧다고 썼지만, 그 이면에는 캔버스 앞에 앉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삶의 자세에 대해 사유하고 흘려보내고 지우고 덧그리며 그 누구보다도 예술에 임했던 마음가짐을 중시하던 그의 숨은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삶을 살아가며 쌓은 경험, 노동과 땀과 혼이 배도록 하루이고 며칠이고 때때로 몇 달을 두고 몇 번을 되풀이해 마음에 들 때까지 완성을(혹은 미완성을) 기한 노장의 기록은 겸허하고도 소박한 어조로 일상다반사를 진솔하고 담백하게 풀어낸다. 장인 김환기 화백의 죽음도 등장하고, 여행하며 느낀 바, 아내와 아들에게 오손도손 작성한 엽서와 편지도 실렸다. 비가 내리는 날에 관해 적는가 하면 간간이 현대미술에 대한 회의나 진정한 예술, 영원불변한 예술에 대해 자신이 통감하는 바를 써 내려갔다.
어느 날은 예술이란 생활의 흔적일 뿐이라 생각했고 자연 그대로의 질감과 빛깔이 영원성을 지니고 있는 미가 아닌가 싶다며 흙 빛깔을 두고 자연이 썩어서 정화된 빛깔인가 되묻기도 한다. 추상화를 그리는 것은 무에서 유를 낳는 힘든 작업이 아닐 수 없다고 토로하고, 이러한 진통과 고뇌를 겪으며 대가가 감지한 시대의 직관적인 예술적 통찰도 오롯이 편찬되었다. 미술 이전에 사람과 그 사람의 자세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더 차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내 일을 더 열심히 하겠다는 노장의 포용력과 기백, 수수함을 추구한 와중에도 감출 수 없는 품위와 고아함이 여과 없이 담긴 기록을 읽어 보는 경험은 더할 나위 없이 귀하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피상적으로 표피가 알록달록하고 빛깔이 곱고 뭐 이런 거가 아름답다고 난 생각 안 해. 진리에 사는 것 진리의 생명을 거는 것. 그게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진실한 사람은 착하게 되어 있고 진실하고 착한 사람은 내면세계가 아름답게 되어있어. 그것뿐이에요." – 윤형근
장소 PKM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7길 40)
기간 2024.05.02 - 2024.06.29
엘르 코리아 닷컴 #요즘전시 칼럼(2024.05.07 게재)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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