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스타트업 #해외취업
베를린은 그야말로 스타트업의 성지.
스타트업 시작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지원도 많고,
대부분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IT 관련 스타트업이 많다보니
말도 안되는 규모로 시작해서 점점 회사를 키우고, 자리를 잡고,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쯤 때로는 큰 회사에 팔리기도 하는-
이름 대면 알만한 스타트업(이제는 더이상 아닌...)부터 정말 이제 막 시작하는 곳까지
그 수가 얼마일지 감도 안잡힐 정도로 많다.
이는 초창기에 베를린 정부에서 IT 관련 기업을 시에 유치하기 위해 전폭적인 지원과 베넷핏을 준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한 많은 이들의 열정과 노력, 도전이 이루어낸 결과이다.
무튼,
나는 소위말하는 그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미리 말하지만, 우리 회사는 누구나 알만한 소위 핫한! 스타트업은 아.니.다.)
우리회사는 자체 제품을 직접 디자인 & 생산하고, 그것을 온/오프라인 유통채널로 판매하는 D2C e-commerce이다.
파운더 1인이 본인의 주방에서 시작했다는 이 사업의 시작은 지난 몇 년간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다.
지금 3-4년째 이 회사와 함께하고 있는데, 지금은 큰 회사와 한 식구가 되어 완전한 스타트업의 스피릿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내가 입사했을 때만해도, 약간 '응-?' 이런 느낌? 하하...
아마도 내가 지금껏 풀타임+프리랜서로 일한 경력 중 지금 우리 회사가 규모적인 부분에서는 가장 작은 회사아닐까 싶다.
- 장단점이라는 대신 내가 굳이 특이점이라 적은 이유는 내가 장점이라 생각하는 부분들이 누군가에게는 단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이점 1. 팀에 팀장이 없었다.
그 말인 즉슨, 상하관계 없이 모두 평등하게 일을 했다는 것
이것은 경우에 따라 장점으로 볼 수도 있고, 단점으로 볼 수있을 것 같은데...
나의 경우에는 각자가 오너쉽을 가지고 평등하게 일했던 부분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디자인팀의 경우 대부분 팀장의 디자인 스타일을 따라 가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디자인적으로 막히거나 큰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모두 함께 상의하고 의견을 주고 받으면 결정한다. (이 부분은 팀장이 생긴 지금도 동일하다.)
특이점 2. Every opinion matters.
이게 초창기 우리 회사의 모토였는데, 모든 사람이 모든 부분에 대해 편하게 의사를 표현하거나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덕분에 나도 입사 3개월만에 리브랜딩 제안서를 제출했고, 그게 잘 진행되어 전체 프로젝트를 리드했고-
지금까지도 브랜딩 관련 프로젝트는 내가 전담하고 있다.
특이점 3. 심지어 대표는 나보다 3살이 어리다.
참 젊은 회사다. 그래서 참 역동적이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20대. 평균연령이 32세였던 우리팀이 최고령팀이었다.
물론 각 부서마다 나이가 조금 더 있는 직원도 있고, 공동대표는 나보다 5살이 많았다.
하지만 외노자의 신분으로 독일인도 유럽인도 아닌 나에게 이 젊은 회사는- 회사가 끝나고 함께 맥주마실 수 있는 친구들을 주었고,
여름이 되면 함께 비치 발리볼을 할 동료들을 주었고, 일 외에도 함께 여행을 다니는 여행메이트들을 안겨주었다.
대부분 독일인이 많은 회사나 조금 더 어른스러운 분위기(?)의 회사들은 이미 가정이 있는 분들도 많고,
이런저런 이유로 동료들 간의 사적인 교류가 거의 없다고 들었다. (이전 프리랜서로 일했던 몇몇 곳들도 그랬고..)
동료와 사적으로 엮인다는 것이 좋지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어디나 가십좋아하고, 뒷담화 좋아하는 이들은 있다.),
나의 경우는 운이 좋았는지 지금까지도 함께 일할 때는 전우애로, 일이 끝난 후에는 불타는 우정으로 뭉치는 이들이 있다.
특이점 4. 백투 더 아날로그
이 회사- 참... 아날로그 적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은- 체계가 없었다는 것. (하하)
예를 들어 지금은 HR 시스템을 구입해 사용하고 있지만, 처음 몇 년 간은, 연차나 휴가를 내고 싶다면 그냥 종이 폼에 날짜를 기입하고,
대표에게 직접(!) 싸인 받으면 끝. 짧은 병가의 경우는 팀 단체 그룹챗에 '나 아퍼서 오늘 쉼' 보내면 끝.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이노무 회사 워크보드도 없어서 마케터가 디자인이 필요하면 디자인실에 직접 와서
구두(!)로 물어보곤 했다. 우리 포스터 필요한데 디자인 해줄 수있냐고...ㅋㅋ
체계가 아직 잡히지 않아 내가 체계를 만들어 갈 수있는 장점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 회사는 나의 건의로 워크 프로세스를 바꾸었다.),
시스템적으로 불안정하니 여기저기 참 허술하고, 뭐랄까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부분이 반드시 있다.
대표도 대표가 처음이고, 마케터도 마케터가 처음일 수 있는 그런 회사.
불완전하고 실수 연발이지만, 다들 열정 불사르면서 일하는 그런 회사.
특이점 5. 시간이... 너-무 걸린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나의 입사 후 첫 연봉협상. 1월 초에 시작된 연봉협상은 느린 커뮤니케이션과
너무 바쁜 대표의 스케줄로 나와 HR 미팅과 이메일 핑퐁을 한참 마친 2월 말미에나 완료가 되었다.
보통 큰 회사들은 연봉 테이블이 정해져있고, 일정 %만큼 매년 오른다.
스타트업이나 작은 규모의 회사의 경우 독일은, 대부분 본인이 직접 연봉협상 미팅을 요청해야 한다.
작은 회사이고, 대표가 결정만 내리는 위치가 아닌 직접 발로 뛰고, 일을 해야하는 부분이 많은 만큼-
대표가 결정을 내려야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린다.
이거슨 유리문 사이트를 보면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이 리뷰에서 나타고 있는 문제이다.
특이점 6. 취중근무
여름은 덥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직원들에게 주는 베네핏중 하나는
'Free beer & fresh fruit'.
우리 회사는 금요일은 공식적인 비어 프라이데이!
이건 우리팀 특이점이기도 하지만 비어 프라이데이에, 이미 3시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마시며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중요한 미팅이나 하이시즌에 술을 먹고 미팅에 들어가는 미친 짓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만큼 자유롭게 일하는 분위기라는 것. (맥주 한 병 따위에 취하는 사람은.... 우리 회사에는 없다.)
다른 팀은 대부분 4시 혹은 업무를 마친 5시에 본격적인 비어 타임.
자유롭게 사무실 여기저기서 맥주마시고 다른 팀들과 교류할 기회도 갖고, 특별한 날 (누군가의 생일이나 farewell)에는
다들 피자나 각종 음식들을 서로 가지고와 함께 먹거나, 회사가 제공하거나, 생일 당사자가 쏘기도 한다.
+ 이건 여담이지만 코로나 이전 우리는 친한 동료 열댓명 정도 매주 금요일 점심마다 돌아가며 각자 나라의 음식(그리고 술)을
준비해 함께 먹곤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이탈리안 와인 마시고 오후에 일하고, 어느 날은 내가 동료들에게 소주를 먹이고 일하기도...
특이점 7. 연봉은 며느리도 모른다.
연봉은 정말 스타트업마다 천자 만별이다. 이전 포스트에도 적은 적이 있지만,
핫한 모 스타트업 주니어 디자이너와 그 회사의 1/4 규모도 안되는 우리 회사 주니어 디자이너의 연봉은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회사는 연봉선상이 높은 편은 아니다.
본인이 적극적으로 연봉협상을 해야 올라가는 분위기?
다른 스타트업의 경우 정말 말도 안되는 금액을 제시하는 회사들도 있지만,
튼튼한 투자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회사라면 규모가 작아도 연봉선은 높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베를린은 연봉이 아주 높은 도시는 아니고, 아마도 향후 몇년간 더 내려갈 것 같다.
그래픽 디자인의 경우 비자지원도 필요없는 독일 외의 각종 유럽국가에서 말도 안되는 연봉으로도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널렸으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동유럽 출신인 나의 동료 G양은 나보다 입사도 1년 먼저하고, 그 전에 다른 곳에서 경력도 나와 비슷하고,
특히 이 친구가 하는 업무가 회사에서 이 친구밖에 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연봉을 한참 밑돌게 받고 있었다.
IT쪽도 비슷하다. 비유럽권 특히 요즘은 인도에서 많은 인력들이 독일 스타트업씬으로 유입되면서
재정적으로 탄탄하지 못한 회사들입장에서는 비슷한 실력이면 조금이라도 더 적은 연봉으로 고용할 수 있는 인력을 찾게되는 것.
지금까지 내가 적은 특이점들을 보고,
누군가는 유럽식의 자유분방함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누군가는 뭐 저딴 회사가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회사의 수많은 나사 중 하나로 돌아가는 곳에서 일하기 보다는,
나의 능력을 빛내고, 의견을 피력할 수 있고, 그 아이디어가 실현화가 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스타트업에 대한 단순한 환상만을 가지고 입사를 하기에는
특히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엄-청 답답할 것이다.
체계가 잡히지 않은 곳도 많고, 일처리는 아주아주 느리며, 오피셜 문서 한 장 받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모든게 느린 것은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유럽이 대체적으로 그런....)
내가 만약 지금의 나이에 한국에서 직장동료와 사적으로 엄청 엮이는, 체계도 잡히지않은 회사에서 일을 해야한다면,
솔직히 고민 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이유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하겠지만,
이 곳이 '외국'이고 내가 '외국인'인 이유도 작용하는 것 같다.
각자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어우러져 일하고, 업무 후에는 다 같이 맥주마시고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는..
눈치 볼 것 없이 싫은 부분은 정중히 거절하고, 그것이 또 수용되는 그런 분위기.
물론 여기도 팀이벤트나 소위 우리나라로 치면 회식(?) 하자고 할 때 빠진다고 하면 서운해 하기는 한다. (인간적으로 ㅎㅎ)
하지만, '노'라고 말하면 굳이 세번 네번 되묻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거절을 하며 굳이 사유를 쥐어짜내지 않아도 되는 그 분위기가 나는 좋다.
만약 10년 후 혹은 20년 후에 내가 아직도 독일에 살고 있고,
가족도 만들고, 소위 정착이란 것을 이 곳에 하게된다면...
그때는 내가 달라지만큼 내 생각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