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독일어를 못해도 살 수 있을까?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24시간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익숙해지기까지 굉장한 스트레스이고, 힘든 일이고, 상당히 많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외국에서 생활을 꽤 오래한 지금도 피곤하거나 너무 이른 아침에는 영어로 말하는 것을 여전히 버벅버벅 할때도 있다.
언어는 습관이라는 말이 정말 마음으로 와닿는 순간이다.
독일에 살면서 더욱 우스운 상황이 발생했다.
영어로는 영어대로 힘들고, 독일어는 독일어대로 안늘고, 한국어도 자주 쓰질 않으니 결국 한국어도 점점 잃어가는 바로 그 유명한 0개 국어 가능자가 되어가고 있으니...
나의 첫 외국어/외국 생활은 영국이었다.
석사과정 입학을 위해 어거지로 아이엘츠를 따야하긴 했지만, 하지만 이때 나에게는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적절한 핑계거리가 있었다.
'나는 유학생이다'라는...
영국에는 비교적 한국사람도 많고, 마음만 먹으면 학교안에서도 영어 한 마디 뱉지않고 생활 할 수 도 있다.
내가 다닌 석사과정은 꼭 들어야하거나 출석체크를 하는 강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대부분 클라스메이트끼리 전시를 하거나 교수와 크리틱할때 등등..
매우 한정적이다.
본인 작품과 에세이, 논문만 잘 작성한다면-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졸업하는 데에는 그다지 큰 결격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영어를 한다면, 즉 그 나라의 언어를 안다면-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알 수 있고,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당연.
사실 영국에서 2년 살았다고해서 내 영어실력이 눈부셨던 것은 아니다.
그저 영어로 말하고, 공부하고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을 정도였지...
만약 영어로 '일'을 하거나 병원에 방문을 해야한다면-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물론 나는 런던에서 영어로 일을 한적도 있고, 면접을 본적도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나의 영어실력은 겨우 일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정도의 실력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어휘력이 딸려 특정 단어를 모르거나 생각이 안나도, 그걸 영어로 풀어 설명하며 대화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
그 때 누군가 나에게 영국에서 2년 살았으니 영어 잘 하겠다? 라고 물으면 나는 2년 살았으니 두 살만큼 말할 수 있다라고 너스레를 떨며 대답하곤 했었다.
그렇게 나는 2년을 산 두 살먹은 아이와도 같은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식하면서도 용감하게 베를린에 입성했다.
베를린으로 이사를 결심한 이유는 참으로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영어'로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지독하게도 싫어했던 내가 영어로 생활이 가능한 나라를 선택해서 이사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참 아이러닉하지만-
유럽에서 한국어로만 생활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불가능한 일이므로...
차선책은 당연히 영국 외에 영어로 생활이 가능한 나라.
그리고 그 곳이 바로 베를린이다.
베를린에 처음 입성할 때, 내가 독일과 독일어 대해 아는 것 이라고는 맥주와 소시지의 나라, 음식이 영국 다음으로 맛이 없는 나라, 그리고 할로/당케 정도.
당장 독일어를 못해도, 영어로 생활이 가능하다보니 독일어 알파벳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고, 사실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베를린이라고는 하나 독일어를 못하는 삶이 녹록치는 않았다.
제일 먼저 문제가 되었던 곳은 마트.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독일어 한 마디도 못하는 상태로 독일에 입성할 생각을 했을까 싶다.
당연하게도 마트에 모든 것은 '독일어'로 적혀있다.
독일어와 영어는 비슷한 단어도 많아서 대충 생긴 모양이나 영어와 비슷한 단어를 유추해서 사는데 무리가 없는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처음에는 작은 '세탁세제'하나 구입하는 것도 쉽지않았다.
구글번역기로 열심히 단어를 찾아가며 하나하나 구입하고 배워가고.
레스토랑이나 카페, 상점 등 큰 가게나 번화가에서는 대부분의 점원분들이 영어를 간단하게나마 할 줄 아신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적은 전혀없다. 대부분 불친절하거나 이 곳 사정을 잘 모르는 관광객인 줄알고 함부로 대하는 것들이 문제였지.
하지만 이런 종류의 쓰레기들은 어딜가나 있다.
배운 독일어를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주문할 때 좀 써보려고해도-
독일어로 주문하면, 내가 독일어를 하는 줄 알고 간혹 독일어 질문 세례를 쏟아내시는 분들이 종종 있어서
왠만하면 나는 주문 정도는 영어로 한다. (귀찮아서-)
독일어가 유창하지 않아 힘든 곳은 대략 이 세 곳인 것 같다.
관청 방문, 병원 방문, 그리고 회사.
- 관청
베를린 관청(혹은 독일의 모든..)은 불친절하기도 유명하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대부분 친절한 담당자들만을 운좋게 만나 별로 나쁘거나 고생한 기억이 많지 않지만, 베를린에 1년 살다간 아는 동생은 나보다 훨씬 유창한 영어를 구사함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베를린 관청 방문 이후로 1년만에 학을 떼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불친절함과 독일어의 콤보는 독일어를 잘 하지 못하는 외국인에게는 언제나 쉽지않다.
하지만 이 곳은 독일이고 관청은 독일에 관한, 독일에서 필요한 업무를 보는 곳이므로- 언어에 대해 불평하기는 객관적으로 쉽지않다.
물론 외국인청에서 조차 영어로 업무를 보지않는 것은 좀 아쉬운 부분이다.
외국인청은 말그대로 독일인이 아닌 사람들이 방문하는 관청이다.
외국인 방문객이 100% 이 곳에서 조차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사실은 아무리 독일 관청임을 감안하더라도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 병원
외국에 살면서 최대한 병원에 방문 할 일이 많이 없으면 좋겠지만, 사는 기간이 점점 길어질 수록 다양한 병원을 방문하게 된다. 꼭 아파서 방문하지 않더라도 정기적으로 체크해야하는 것들도 생기고-
무튼 병원은 대부분의 의사는 당연히 영어를 한다.
의학용어는 영어가 많고, 논문이나 서적들도 영어로 된 것이 많음으로..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정도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예약을 잡을 때 연락을 해야하는 리셉션에서 영어를 못하는 경우이다.
나의 경우 그래서 리셉션에서 간단하게 나마 영어가 가능한 곳을 찾거나,
온라인 예약사이트 ( www.doctolib.de )를 이용해 온라인으로 예약을 잡는 것으로 해결한다.
두번째는 영어도 나의 모국어는 아니라는 점이다.
심지어 한국어로도 종종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설명하기 쉽지않은 경우가 있는데, 영어로 설명하는 것은 더욱 쉽지않다.
친절한 의사의 경우 최대한 설명을 해주거나 그래도 안되면 직접 구글창을 열어 독일 의학용어를 번역기로 돌려 보여주기도 한다.
심지어 한국말 번역된 말도 의학용어 이기때문에 생소한 경우가 많다.
외국에서 병원을 방문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않은 일이다.
- 회사
우리 회사의 공용어는 영어이다. 하지만 이 영어로 물론 내 모국어가 아니기때문에 때때로 의사소통에 시원함을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문제는 독일 회사의 대부분은 그들의 비지니스 마켓을 독일어권(DACH) 시장이나 유럽 시장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디자이너로써 이 언어를 모두 알 필요는 없지만, 다른 유럽 디자이너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보통 유럽에서는 다른 나라언어도 함께 배우는 경우가 많아 적게는 2-3개 많게는 4-5개의 유럽언어를 기본적으로라도 구사하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스페인 디자이너 친구의 경우 본인의 모국어인 스페인어, 그리고 스페인어와 매우 유사한 이탈리아어도 이해가 가능하고, 학교에서 배웠다는 프랑스어도 기본은 구사가능하고, 베를린으로 이사온 후 공부한 독일어도 B2정도의 수준으로 구사가 가능하다.
거기다 영어. 즉 이 친구는 5개 국어가 가능하다는 것.
게다가 대부분의 독일 회사들이 독일어권,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가까운 나라를 중심으로 시장을 확장해나간다는 기준으로 봤을 때, 디자인 실력을 떠나 기본적인 스펙을 놓고 봤을 때, 영어와 한국어, 그리고 정말 아가 수준의 독일어를 구사하는 나는 한참 밀린다.
회사에서는 사실 딱히 독일어로 고생하거나 문제가 되었던 적은 없다.
공식 문서는 다 영어화 되어있고, 일을 할 때에도 카피는 각 나라 담당 카피라이터들이 작성하므로 내가 독일어를 주의깊게 살펴봐야하 경우는 많지 않다.
다만, 독일어를 할 줄 안다면 구직/이직을 할 시 회사와 포지션의 선택의 폭이 확연히 넓어진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
특히 사용자를 분석해야하는 UX분야나 고객을 직접 대면해야하는 에이전시 등에서는 필수로 독일어가 가능한 사람만을 뽑는다.
하지만 크고 작은 스타트업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굳이 독일어 공부에 열을 올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그런 경우이고..)
개인적으로는,
독일에 처음와서 3달 정도 지나 집도 구하고, 은행계좌도 열고-
대부분 필요한 것들을 끝냈을 때, 같이 살던 독일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독일어 학원(VHS)를 등록했다.
그곳에서 4달정도 기본적인 독일어를 배웠다.
인사말, 독일어 읽는 법 등등 - 그렇게 A2까지 마치고 학원을 그만 두었다.
이유는 나는 언어를 굉장히 더디게 배우는 타입이다.
그 당시 내가 독일어를 그렇게 공부한다고 해서 바로 일을 하거나 내 디자인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독일어를 늘리는 것이 단기간에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에, 차라리 부족한 비니지스 영어를 조금 더 공부해서 빨리 프리랜서 프로젝트나 일을 구하는 것이 이 곳에 정착할 것이라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지금 나는 다시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독일어 수업을 듣고 있고, B1-1 수업을 듣고 있다.
일주일에 두번하는 이 수업은 독일어를 늘리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지금 알고 있는 독일어라도 까먹지 않기 위해 듣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다.
나는 곧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데, 이때 최소 B1를 요구함으로-
정말 영주권을 신청할 결심이 선다면, 독일어 공부에 이제는 정말 매진해야할 시간이 되었...
영어로 일을 하고, 이 곳의 90% 인간관계가 영어라는 언어로 형성되어있는 나는 '영어'를 잃지 않고 늘리면서도 '독일어'를 해야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아직도 내가 아는 영어 단어들은 몇 천개일 뿐이고, 그 중 아는 단어들로 결국은 일하고 생활하고-
모국어가 아닌 이상, 내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영어도 결국은 일상생활에서 그 언어를 사용한다고 늘지는 않는다.
그런 와중에 독일어.
사실 처음에는 내가 독일에 얼마나 살 줄 알고 독일어까지 해야하나- 싶었다.
그것이 벌써 눈 깜짝할 새에 5년.
사실 지금도 내가 독일에 평생 살 결심을 세운건 아니기 때문에 독일어를 꼭 해야하나- 하는 의구심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영주권을 딸 때 요구하는 B1는 초중급 정도 수준의 독일어 이므로 이것을 딴다고해서 독일어가 유려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독일어로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 되려면 '노력'을 해야하는데 영어로 모든 생활이 가능한 이 곳에서 그 노력을 하기는 것이 여간 쉽지가 않다.
종종 이런 생각도 했다.
처음 영국에 갔을 때 영어가 안되면 생존이 불가능했음으로 영어를 더욱 열심히 했던 것 처럼 차라리 영어를 못해서 꼭 독일어를 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상황이었다면 내 독일어가 지금 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늘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
생각해보면 언어의 딜레마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은 결국 내 마음가짐의 문제이다.
영국은 그 나라와 문화의 매력에 빠져, 언어 무능자인 나도 그 언어를 조금은 쉽게 배웠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곳에서 이미 5년을 살았음에도 독일문화는 여전히 나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가 않다.
나는 베를린과 베를린의 문화가 좋은 것이지, 독일의 문화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직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지난 5년간 나의 독일 문화에 대한 매력발견도, 독일어 실력도 아주 아주 더디게 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