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디자이너의 소소한 일상
연말연초는 정말 바람처럼 시간이 지나간다.
날이 짧아지고, 날씨가 추워지고, 따듯한 글루바인과 달달한 초콜릿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계절이 오면- 눈 깜짝할 사이에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새해가 오고, 구정이 지나가고-
그렇게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어느덧 세 번째 달의 시작으로 내닫고 있다.
늘 그렇듯 11월 즈음이 되면 친구들과 이곳저곳 다른 크리스마스 마켓을 방문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작년에는 비교적 11월 12월부터 눈이 많이 내려서 크리스마스 마켓에 방문할 때 더욱 극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곤 했다. 이제 베를린에 산 지 n연차가 되다 보니, 크리스마스 마켓은 더 이상 새롭지는 않다.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러 간다기보다는,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고 글루바인(뱅쇼)를 마시고, 맛있는 것 사 먹고, 크리스마스 마켓 분위기를 즐기러 갈 뿐이다.
작년에는 나름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크리스마스 마켓도 들러서 재미있었다. 매년 사는 머그도 구입하고, 친구들을 위한 선물도 구입하고. 추운 날에 밖에서 마시는 따듯한 글루바인 한 모금- 글루바인 자체가 맛있다기보다는 모두가 그 특유의 크리스마스 마켓의 분위기를 더 좋아하는 듯하다.
코로나 이후로 물가가 많이 오른 덕에, 글루바인 가격도 크게 올랐다. 특히 크리스마스 마켓에서는 글루바인 대부분 머그나 유리잔이 담아 파는데, 컵 보증금까지 합하면 꽤나 비싼 가격이 돼버리고 말았다. (물론 보증금은 컵은 다시 반납하면 돌려받는 금액이다.) 이러다가 정말 올해 크리스마스 마켓부터는 집에서 글루바인 끓여 마셔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2월 즈음 되면 매년 돌아오는 베를린의 연중행사- 베를린 영화제가 돌아왔다. 영화제를 쫓아다닐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매년 한편씩은 보게 되는 것 같다. 매년 친한 독일 친구가 먼저 연락해서 알려주고, 티켓팅도 해주는 덕에 올해도 베를린 영화제의 한 부분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는 상업영화에는 관심이 많지 않아 대부분 단편영화를 보는 편이다. 영화의 호흡이 길지 않아 가볍게 보고, 여러 편을 동시에 묶어 상영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서 다양한 영화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다. 내가 미쳐 놓친 부분을 친구가 발견하기도 하고, 친구가 의아해하는 부분을 내가 캐치해 알려주기도 하고-
매년 같은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부턴가 이것이 우리만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베를린에 오래 살다 보니 이런저런 나름의 전통과 루틴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매년 같은 곳, 같은 이벤트- 그러나 다른 추억이 자리 잡아가는 그런 삶.
지금 다니는 회사는 비교적 일하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지금도 급 좋아진 날씨에 신이나 집 근처 카페에 노트북 하나 덜렁 들고나와 일하는 중. 기왕 나온 거 조금 더 돌아다니다 가려고, 아마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이 일을 마칠 것 같은 날이다.
그렇다 보니 바쁘지 않을 때에는 내가 정말 작정만 한다면 무한대로 늘어지기가 가능하다. 물론 어느 정도 평소에 일을 해야 하는 정해진 일의 양과 데드라인들이 있지만, 신규 프로젝트가 적은 요즘은 비교적 여유로운 편이다. 그렇다 보니 내가 일을 찾아 하지 않는 이상은, 상대적으로 일하는 시간이 매우 여유롭다.
이러한 여유로움을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때론 너무 여유롭고 평화로운 이 상황에 조금은 지루함을 느끼기도 한다. 내 능력과 열정을 쏟아부을 곳이 없다는 것은 때로는 나에게 지루함을 선사한다.
가끔 나라는 사람에 대해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잠시 쉬어가는 (회사에 다니지 않거나, 학생일 때) 한없이 잘- 논다. 마치 한량처럼. 그런데 막상 그때는 또 나름대로 그 여유로움이 잘 젖어들어 하루하루 멍을 때리기도 하고, 티비를 보기도 하고, 별로 하는 일 없는 그 시간을 지루하거나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이런 삶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별로 야망이 없는 타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막상 회사에 들어가고 일을 시작하면, 나의 마인드 셋은 한순간에 바뀌어 버린다. 일 욕심이 생기고, 내 능력이 펼치려 하고, 일에 열정을 쏟아붓고, 없던 일도 찾아서 만들어내는- 그리고 그때그때 나름의 목표를 만들어 차곡차곡 달성해 나가는 데에 희열을 느끼는. (이럴 때 보면 또 야망이 있는 것도 같다)
그렇다 보니, 한 5년 정도 일하고 1-2년 쉬어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패턴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 몇 년 스스로를 막 몰아쳐서 열심히 일하다가, 또 한 몇 년은 정말 세상 한량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지금은 벌서 휴식 없이 쭉 일을 한 지 6년, 이제 좀 쉴 타이밍인가?
이런저런 개똥철학이 난무하며 이렇게 2024년은 또 시작됐고,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