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디자이너의 소소한 일상
올해는 정말 어떻게 지나간 건지 모르게 빠르게 지나갔다.
근데, 이게 '아, 정말 올 한 해도 바쁘게 보냈구나. 참 시간 빠르다.' 이런 좋은 느낌이 아니라,
'아,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일 년이 갔네.' 이런 느낌?
올해는 작년처럼 여행을 많이 한 것도 아니고, 뭔가 엄청 바쁘게 지낸 거 같지 않은데- 그저 하루 잘 버티고, 일주일 잘 버티고, 한 달을 또 버티고- 그래서 일 년이 지나가버리는 느낌이다.
#베를린, 그 여름은 짧았다
올여름은 참 이상했다. 이상 기후를 온몸으로 느낀 여름이었다. 아무리 베를린이 '회색 도시'로 유명하고 '겨울-겨울-여름-겨울'의 날씨로 유명하다지만, 올여름은 유난히 짧았다.
베를린의 2월부터 5월까지는 보통 미친 날씨의 연속이다. 주구장창 비가 오다가 갑자기 반짝 봄날 같은 날씨가 튀어나오는 2월, 보통 예측불허의 미친 시기라고 불리는 3월-4월, 운 좋으면 날씨가 좋고 운 나쁘면(?) 눈도 볼 수 있는 5월...
그래도 여름이 시작되는 6월부터는 제법 따듯하고, 공원에서 피크닉도 그려볼 수 있는 날씨들이 시작되는데- 올 6월과 7월은 유난히 비가 오는 날이 많았다. 온도도 그리 높지 않아 여름이 온 것을 거의 체감할 수가 없었다.
일례로, 베를린에서는 1년에 한번 'Fête de la Musique Berlin'이라는 행사가 있는데, 베를린 전역에서 다양한 라이브 공연이나 콘서트가 한 날 여기저기서 열리는 날이다. 단순히 공연장뿐 아니라 바, 카페, 심지어 길거리 버스킹도 많은 그런 이벤트. 이 이벤트는 1년 중 해가 가장 긴 날 '하지'에 열린다. 하지는 보통 6월 20일 언저리쯤. 매년 이날은 여름 같은 날씨 아래 야외 바나 공연장에 앉아 친구들과 공연을 본 기억이 있는데, 올해는 여름인 게 거의 체감이 안될 정도로 날씨가 선선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더워진 8월 반짝 여름. 그렇게 한 달의 여름이 반짝 지나가고, 9월에 접어들자- 한 주는 30도까지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바로 다음 주는 갑자기 10도 아래로 뚝 떨어지는 날씨로 변해버리는 미친 날씨가 시작되었다.
이제 겨우 10월 초인데, 벌써 난방 켜고, 전기장판 켜고 자니 말 다 했지.
역시 베를린은 겨어어우울-겨어어우울-여름-겨어어우울.
겨울 시작이다.
#계획에 없던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작년에 여행을 해도 너무 많이 했다. 크고 작은 여행을 거의 5월부터 9월까지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한 꼴. 그렇다 보니 올해는 좀 자중한 것도 있는데, 올해는 상대적으로 여행을 그리 많이 하진 않았다.
보통 1년에 한번은 한국을 가려고 하는지라, 부모님이 유럽으로 오시지 않는 이상 긴 휴가는 잘 내지 않는다.
올해 5월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짧은 주말여행을 다녀왔고, 그 후에는 사실 여행 계획이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두 번의 여행 계획이 생겨버렸다.
나에게는 일 년에 한번은 꼭 여행을 같이하는 원수 같은(?) 친구 놈들(전 진작 동료들)이 있다. 올해는 그냥저냥 지나가나 했는데, 역시나 완벽한 J 성향의 N 양이 올해도 총대를... N 양의 급추진과 잘 맞아든 타이밍 덕에 정말 가기 불과 몇 주 전에 비행기와 숙소 예약을 마치고 우린 정말 후다닥 떠났다. 물론 이틀 밤의 숙소와 완벽한 가이드 역할을 해준 로컬 Z 양 덕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급 추진된 즐거운 짧은 주말여행 (폴란드 여행기 풀 스토리는 여기).
그리고 역시나 여행 계획이 없었는데, 나를 뮌헨 옥토버페스트로 급 초대해 준 A 군과 많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역시나 불과 몇 주 안에 급 추진된 나의 뮌헨 여행. (옥토버페스트 풀 스토리는 여기)
두 여행다 참 계획도 없고, 급추진된 여행이었지만 정말 즐겁게 깔깔깔 잘 보냈던 여행들이다. 폴란드 여행은 늘 그렇듯 함께하는 친구들과 별거 아닌 거에도 웃음이 넘치는 깔깔깔한 여행이었고, 뮌헨 여행은 맨날 베를린에서 가짜 옥토버페스트만 경험하다가 ㅎㅎ 드디어 진짜를 경험해 본 잊지 못할 여행이 되었다.
역시 여행은 나의 삶의 낙이자 원동력이다.
늘 일 년을 여행 계획 세우고 그때까지 버티고, 또 답답하거나 무기력해지면 여행 계획 세우고 그때까지 버티는... 그런 맛(!)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같다.
#벌써 세 번째 매니저
지금 다니는 회사는 참... 별로 좋지 않은 의미로 변화무쌍하다.
유연한 근무시간, 재택근무, 마음에 맞는 동료들- 등 많은 장점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회사 규모에 비해 성숙하지 못한 경영진의 탓인지 아님 우리 팀이 변화 무쌍한 건지.. 지금 회사를 다닌 지 그리 연차가 오래되지 않았는데, 올해 초, 나는 이 회사에서 벌써 세 번째 매니저를 맞이했다.
첫 번째 매니저는 전체 부서의 디렉터 S로 나를 뽑아준 사수이기도 하다. 디자이너 출신이 아니기에 직접적이고 세세한 멘토링은 S에게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배울 점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단순한 매니저가 아닌 리더에 가까운 면모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는 S는 이 회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내 매니저 역할을 한 사람이다. S가 다른 회사의 더 높은 직책으로 이직하면서, 그녀의 자리는 제품 리드인 M이 임시로 맡게 되었다. M 군은 나와 거의 아웅다웅 함께 투닥투닥 제품과 디자인을 같이 이끌어온 동료로- 그가 내 매니저 이긴 했지만, 우리는 거의 전우처럼 함께 문제들을 해결해나가곤 했다(지금도 그러하고).
그리고 나의 현재 매니저 K. S의 뒤를 이어 원래 한 제품의 헤드였던 K가 그룹 헤드로 승진하며 그녀가 디자인팀도 맡게 되었는데, 그녀는 꽤 경험이 있고, 스마트하고, 프로페셔널한 사람이라 그녀의 능력에는 별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녀의 태도나 커뮤니케이션 방식. 무어라 딱 집어 말할 순 없지만,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커뮤니케이션이 잘되지 않음을 느낀다. 이건 단순히 우리가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해서 생기는 오해가 아니라, 정말 말을 하고, 소통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별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매니저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소통이 정말 중요한 나에게 이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K와 일을 한지 이제 반년 정도 되어가는데, 매니저와 직원으로써의 '일'은 함께하지만, 그녀에 대한 나의 신뢰는 안타깝게도 거의 제로에 가깝다. 문제는 이것이 내 동기부여를 점점 더 떨어뜨린다는 것.
그동안 매니저운이 참 좋았다고 생각하며, 아직은 새 매니저와의 적응기라고 스스로를 위안해 보지만, 마음 한편에는 K와 정말 손발이 딱딱 맞는 날이 올까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답답하지 맞지 않는 매니저 일 수도 있다 생각하며, 최대한 그녀에게 배울 수 있는 부분을 애쓰려고 노력 중.
이렇게 돌아보니 뭔가 많이 한거 같으면서도, 한 게 없이 무기력하게 시간만 보낸 거 같기도 한
참 이상한 2024년이다.
10월이 되니 날씨는 점점 궂어지고- 빨리 시간이 쭉쭉 지나가 크리스마스 마켓 시즌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날씨가 흐린 회색의 베를린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전구로 반짝반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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