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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외계인 Oct 22. 2024

계획 없이 시작한 베를린 살기, 어느새 8년

베를린의 무엇이, 이토록 긴 시간 동안 나를 붙잡아 둔 걸까?


Time flies.

흔히들 하는 말이다. 정말 빠르게 눈 깜짝할 새 흘러가는 시간.


계획 없이 베를린으로 무작정 이사 와서 이러저러 요리조리 이래저래 한 시간들이 모이고 모여, 어느새 계획 없이 시작한 베를린 살이가 8년째를 넘어가고 있다. 

'1년만 살아보자' 생각하고 온 베를린의 무엇이, 이토록 긴 시간 동안 나를 붙잡아 둔 걸까?






여름인데도 날씨가 참 흐렸던 것 같다. 런던에서 날아온 베를린은 런던의 여름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여름이었는데, 날씨가 흐렸던 건지 내 마음이 흐렸던 건지 잘 모르겠다.


큰 캐리어 하나 작은 캐리어 하나씩 양손에 끌고, 그렇게 무작정 계획도 없이 도착한 베를린 공항. 유일하게 계획 한 것이라고는 살 집을 구하기 위해 2주 정도 미리 예약해두었던 한국 분이 운영하는 숙소가 전부였다. 짐이 많은 탓에 그리고 늦은 도착 시간 탓에 숙소에 공항 픽업을 부탁드렸다. 주인분 따님이라는 앳돼 보이는 분이 픽업을 나왔다. 택시를 타고 어두운 베를린의 한적한 길을 달린지 30여 분, 그렇게 베를린의 첫 숙소에 도착했다.


따뜻한 부모님의 집, 늘 아늑했던 영국 홈스테이, 플랏메이트들과 아웅다웅 지냈던 런던의 아파트를 떠나- 베를린의 첫 숙소는 나에게 매우 생경했다. 아마도 스무 명 이상은 지냈을 삐그덕 거리는 침대에, 높디높은 천장에 밤새 간간이 들리는 이웃의 물 내려가는 소리, 창문 밖으로 반짝이는 상점의 불빛들. 이것이 내가 베를린에서 기억하는 첫 밤이다. 


숙소가 내가 원하던 만큼 아늑하지는 않았지만, 주인분은 매우 친절하셨다. 독일어에 'ㄷ' 자로 몰랐던 나에게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도시에 '여행'이 아닌 '살이'를 위해 왔고, 미리 검색해두었던 휴대폰 번호 개통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오랫동안 지낼 방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숙소 예약 기간이 끝날 때쯤 운 좋게 시내 중심에 크게 높지 않은 금액에 괜찮은 방을 구했다. 이사 기간까지는 1주일이 남아서 그 기간에는 멀지 않은 곳에 에어비앤비를 구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악명 높은 주택난을 자랑하는 베를린에서 참 운 좋게 좋은 방을 빠르게 구했다.


첫 집을 구한 후부터는 독일어 수업도 시작했다. 그래도 기본적인 단어와 인사말 정도는 알자!-가 목표였다. 그렇게 첫 베를린 집의 플랏메이트 독일인 친구, 독일어 수업을 알게 된 친구들- 그리고 이 친구들을 통해 만나 또 다른 소중한 인연들.


그렇게 베를린에 내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내 '일'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렇게 베를린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이 시작되었다. 


_


베를린에 와서 첫 몇 년은, 런던을 꽤 그리워했다. 언어 이유가 가장 컸겠지만, 아무래도 첫 정이다 보니 런던, 그리고 영국은 언제나 나에게 왠지 모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첫 유럽 여행도 영국이었고, 첫 해외살이도 영국이었다.

처음에는 베를린에서 일 년 살기를 한 후에 런던으로 이사를 가는 것을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영국보다 베를린에 친구가 더 많이 생기고, 그러다가 어느새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느리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여 빠르게 1년. 그리고 2년, 3년, 4년... 그 사이에 베를린에서만 네 곳의 집에서 살게 되었고, 세 곳의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영주권을 받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8년이 되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독일어는 유치원 생만도 못한 수준이다.

8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독일에서 영원히 살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8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독일이 나에게 맞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족한 독일어를 항상 도와주는 언제나 고마운 친구와 동료들이 있고,

매년 독일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도전을 해볼까 생각하다가도 이만한 곳이 없다며 그렇게 이곳에서 또 다른 일 년을 보내게 되었고,

독일이 나에게 맞는지 모르겠다면서도 어느 순간 미워할 수 없는 나라와 도시가 되어버린 이곳 베를린에서 나는 또 다른 일 년을 보내고 있다.


매년 그렇듯, 지금도 이곳에서 앞으로 몇 년을 더 있을지 모르겠다.

어느 날 정말 우연히 그렇게 느닷없이 베를린에 왔던 것처럼, 그렇게 다른 곳으로 바로 내일 훌쩍 가버릴지도-

내년 이맘때에도 아- 올해도 이렇게 베를린에서 또 한 해를 보내는구나 하고 있을 지도-


아직도 먼 미래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곳에는 현재의 '내'가 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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