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회사의 수습 기간
6개월,
독일에선 누구나 잘릴 수 있고, 누구나 떠날 수 있다.
그 기간 동안의 숨막히는 회사와 나의 줄다리기.
밀당도 이런 밀당이 없다.
보통 독일에서 직업을 구하면 6개월간의 프로베이션 즉 수습기간을 갖는다.
(우리회사 기준, 1년 계약직은 3개월, 무기한 정직원은 6개월)
수습기간을 갖는 이유 중 하나는 독일은 노동자법이 강해서 한 번 고용하면 자르기가 아주아주 어렵기 때문.
그리고 퇴사를 결심했을 때에도 최소한 4주전,
근무기간이나 계약에 따라서는 3개월이나 미리 회사에 통보해야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입사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회사 입장에서도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어떤 회사들은 보통 1년 단위의 계약서를 주고,
계약을 1년마다 연장하거나, 1년 계약이 종료된 후에 무기한 계약서를 주는 경우도 있다.
수습기간 동안은 갑도 을도 모두 보통 2주 안에 통보가 가능하다.
6개월간 긴장하며 일을 해야하는 부분은 좀 살떨릴 수 있을지 몰라도
따지고 보면 을의 입장에서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회사라는 것이 다니다보면 첫 인상과는 다르게
회사 자체가, 업무가, 같이 일하는 사람이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회사도 언제든 나를 자를 수 있지만,
나 역시 언제든 회사를 떠날 수 있다.
일종의 관찰기.
코로나로 모두가 한참 기침소리에 민감했던 3월.
K양은 카피라이터로 우리 회사에 고용되었다.
입사할 때부터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결국 온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며 요란하게도 기침을 해댄다.
보통 감기가 심한 경우 회사측에서도 병가 낼 것을 권유한다.
다른 직원들에게 옮길 수 도 있고, 업무 효율도 떨어지기 때문에.
나 역시 열이 심하거나 기침/재채기를 심하게 하는 경우
병가를 내고 하루 정도라도 꼭 푹 쉬는 편이다.
하지만 K양,
독일인 특유의 우직함과 근면성실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이제 막 입사한 회사에 나쁜 인상을 주기 싫어서 일까?
결국 재택근무 시작 전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출근 도장을 찍었다.
우리 회사의 경우 병가를 내는데 눈치를 주는 분위기는 아니기 때문에
내가 그녀라면 병가를 단 며칠이라도 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막 입사했으니,
업무도 파악해야하고, 아직 수습기간에 있으니
아마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
세일즈 팀 팀장으로 입사한 F양은 입사 초반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유인 즉슨, 팀장급으로 채용했지만 그녀가 보여준 업무 능력이 리더로써 탁월하지 못했기 때문.
더딘 업부 파악과 이미 탄탄한 팀웍을 자랑하는 팀원들과 잘 어우러지지 못하는 듯 했다.
엎친데 덮친 격, 그녀는 건강에도 문제가 생겨
팀장 자리를 무려 2달 이상 공석으로 비웠다.
그녀는 수습기간 중 해고 당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1년이었던 계약기간을 연장하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이름도 가물가물한 프랑스 고객서비스팀의 C양.
그녀는 아마도 우리 회사 최단기 퇴사자가 아닐까 한다.
보통 우리 회사는 누군가 새로오면 그 팀의 팀장이 각 팀마다 새로운 직원을 소개해준다.
서로 얼굴도 익히고, 새로운 식구를 두 팔벌려 웰컴하기 위해!
고객서비스팀은 아마도 가장 입사율과 퇴사율이 높은 팀이 아닐까한다.
업무의 특성상 바쁜 시즌에 보통 단기로 일하는 사람을 많이 뽑는 이유도 있지만,
대부분 아직 경력이 없는 어린 사회 초년생들이
소위 거쳐(?)가는 부서이기 때문이다.
학교를 막 졸업했다는 C양 역시 입사한 날 팀장과 함께 우리팀을 방문했다.
간단히 서로 인사를 하고, 복도에서 마주 친게 두어번.
그러다 한 3일쯤 되었던 어느 날,
회사 그룹 챗에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며 C양은 인사말을 남겼고-
나름 팀안에서 작은 환송회해준 모양이다. (우리 회사 따듯하기도 하지 ㅎㅎ)
나중에 그 팀 팀장에게 듣기론,
C양이 구직 중 넣은 다른 회사의 마케팅 부서에서 합격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다른 회사의 포지션이 앞으로 자신의 커리어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고,
그렇게 그녀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의 6개월은 비교적 무난했다.
우선 디자인 테스트를 하면서 이미 팀원들과 몇 시간 함께 근무를 해본 상황인데다가
회사의 성향이나 상황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지라
밀고 당기고 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 무기한 계약이었지만,
수습기간 후에 연봉/휴가 등을 재협상한다는 내용이 계약서상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6개월간 나의 능력을 최대한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췄다.
처음 3개월은 비교적 업무를 익히는 시간이었고,
나에게 단독으로 주어진 프로젝트가 많지 않아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문득 우리 회사의 최약점인 브랜드 이미지를 떠올렸다.
우선 우리 브랜드의 현 이미지를 파악하고 분석, 경쟁사와 비교하여
입사 3개월만에 팀장과 이사, 팀원들에게 회의를 요청하여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했다.
반응은 긍정적이였고, 그 후 1년만에 우리 회사는 리브랜딩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 후 내가 디자인한 상품들이 좋은 반응을 얻어
6개월 후 무난하게 재협상을 마칠 수 있었다.
물론 6개월동안 나는 아플땐 병가도 내고,
부모님이 베를린에 방문하셔서 휴가를 내기도 했다.
나의 경우는 재협상이 걸려있었던만큼 업무 성과를 보여주는데 힘을 썼지만,
대부분 수습기간내에 큰 업무상 실수가 없고, 회사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면
보통 수습기간 후 무난히 살아남는 편이다.
베를린은 특히 이직률이 높은 도시 중 하나다.
한 회사에서 보통 2년 가까이 일했다고하면
오래 일했다고 할 정도니까.
평생 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요즘
특히 프리랜서들이 판치는 베를린에서
굳이 한 회사에 목숨걸며 다닐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몸담을 회사에
기왕이면 애정을 가지고
오래오래 함께 성장하면 좋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