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도둑맞아 비로소 쓰여진 여행의 짧은 기록들 3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인상은 ‘어려움’이라는 정서와 함께 온다. 언어의 어려움, 체계적이지 않은 시스템의 어려움, “Hello, Excuse me, Sorry" 가 생활화 되어있는 영국에 비해 사람들이 사람들의 ‘불친절함’이 도드라지고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화산섬의 풍경은 그 자체로 압도적이다. 왜인지 푸르고 노랗고 원색적인 남부의 컬러들이 인상적이었다. 에게해 근방의 해양 국가들의 미술이 생각났다. 건축은 개방적이고, 생동감 있고 생기 있는 작품들이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풍성한 곡식들의 수혜와 함께 태어난 활력 있는 문화라고 느꼈다.
실제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호방하다. 영화 “la grand bleu”에서 장 르노의 인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요트에서 파스타와 화이트 와인을 즐기며, 굴하지 않는 승부욕을 보여주는 호방함. 남부의 바다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이곳을 보기 전부터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 낯선 지역에 대해 내가 갖는 심상은 모두 문학, 영화에서 오는 것이었다. 특히 난 『이방인』을 여러 번 떠올렸다.
“4시의 태양은 과히 뜨겁지는 않았으나 물은 따뜻했고, 길게 퍼진 작은 물결이 나른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리가 놀이를 한 가지 가르쳐 주었다. 헤엄을 치며 물결 등성이에서 물을 들이마셔 가지고 입속에 거품을 가득 채운 다음 반듯이 누워서 하늘을 향해 그것을 내뿜는 것이다. 그러면 물거품 레이스가 만들어지면서 공중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미지근한 보슬비처럼 얼굴 위로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입속에 짠 소금기 때문에 얼얼했다. 그러자 마리가 다가와 물속에서 나에게 달라붙었다. 마리는 자기의 입술을 나의 입에 갖다 대었다. 그녀의 혀가 나의 입술에 산뜻하게 닿았다. 잠시 동안 우리는 물결 속을 뒹굴었다."
『이방인』민음사, 2011
로맨틱한 장면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마지막 두 줄이다. 이 소설을 보며 뜨거운 태양, 눅진한 소금기 맴도는 공기를 상상했다. 이탈리아 남부는 그런 곳이었다.
이탈리아는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도시 시스템도 그리 발달하지 않아서 여행하기엔 불편함이 많았다. 예정에 없었지만 비행기표를 잘못 예약하는 바람에 억지로 끼워 넣어진 일정이라 지낼 곳에서부터 갈 곳까지 모두 급하게 결정됐다.
히드로 공항에서 밤을 지새고 새벽께 비행기를 타고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에서 나폴리까지 바로 기차를 타고 이동했고, 나폴리에서 소렌토까지 사철이라는 우리나라 과거 비둘기호 같은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산업혁명을 이룬 국가에서 갑자기 하루 종일 이탈리아 남부까지 내려가게 되니 모든 풍경이 생경하고 낯설었다. 기온이 20도가 되지 않고 하늘이 급격히 흐려지곤 해서 으슬으슬하게 쌀쌀했던 런던과 달리 이탈리아의 태양은 뜨거웠고 공기는 바삭바삭했다.
녹슨 차체에, 덜컹이는 사철을 타고 한쪽에는 남부의 바다, 한쪽에는 폼페이의 유적이 있는 길을 1시간 남짓 가야 했다. 주로 얇고 달라붙는 나시티와 짧은 반바지를 입은 이탈리아 여자들은 짙고 강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사철에는 당연히 에어컨이 없었다. 뜨거운 해가 창에서 쏟아지는데 아랑곳 하지 않고 사철에 앉아 다문 입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는 여자의 이마와 가슴팍의 모공 하나하나에서 송글송글 땀이 맺혀 나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창 밖에는 화산으로 생긴 절벽지형이 자주 보였고, 집에는 원색의 차양막이 쳐져 있었다. 이곳의 건물들은 왜 원색적인 컬러를 갖게 됐을까? 복사열 때문인지 모른다. 노랗고 파란 건물들, 남부의 햇살을 한껏 마시며 튼튼하게 자라난 나무의 탐스러운 초록, 시간이 느린 곳이었다.
* 일련의 여행기는 2015년 여름 40일간의 여행 후 쓴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