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전 우울증이라는 것도 있나요?
번아웃과 무기력에 허덕이는 임신 11주차.
어제는 갑자기 엄습해온 불안감에 거금 99,000원을 주고 하이베베 도플러 심음기를 주문했다. 이유가 없다고 하기에는 몸에 변화가 좀 있었다. 우선 한 사이즈 이상 커져서 터질 것 같던 가슴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었고, 팽팽하던 유두도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공복에 울렁거리는 입덧이 심했는데 완전 잠잠해졌다. 그런데 하필 또 연휴라 병원에 가볼 수도 없어서 쿠팡 로켓배송을 지른 것이다.
원래 5/7에 예약해두었던 기형아검사와 니프티검사도 병원 사정으로 12주차로 확 밀려서 솔직히 짜증이 났다. 연휴라 쭉 쉬려는 것인지 갑자기 기존 일정대로 검사 진행이 어렵다고 통보해와서 회사 스케줄까지 바꿔서 검사 일정을 변경해야 했다. 임신하고 만사 귀찮아서 분만 산부인과만 신촌세브란스로 결정하고 다른 산부인과에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뒤늦게 다른 산부인과에서 니프티검사를 할 수 없는지 알아봤지만 역시나 기력이 없어서 몇 군데 전화 돌리다 말았다. 뭐 다 안 된대.
마지막 초음파는 제주도 여행 가기 전 10주차 0일에 봤다. 뽀꼬는 짧은 다리를 힘차게 차고 있었다. 한 이틀 정도 초음파 영상만 생각하면 그냥 웃음이 났다. 비록 초음파 횟수를 초과해서 (많이 안 봤다고 생각했는데) 비급여로 7만원 돈이 나왔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이 조금 지났는데 왜 뽀꼬 기척이 느껴지지 않지. 그렇게 힘차게 다리를 차던 아기가.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로켓배송만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려서 받은 하이베베로 30분 넘게 배를 이리저리 눌러봤지만 내 맥박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쯤 되자 정말 불안해졌고 기분이 안 좋아졌다. 어제 오늘 입덧이 없어서 집에서 요리를 해먹었고 어쩐지 뱃골이 줄어서 음식도 이전보다 적게 먹었던 게 떠올라서 혹시 정말 잘못된 게 아닐까, 생각을 했다.
남편이 눈치없게 우리는 연휴가 안 맞나봐, 했다가 한 대 세게 맞았다. 지난 설 연휴를 말하는 것인데 그때 두번째 화유를 했었다. 그럼 뭐 지금도 유산이라도 했단 말인가.
솔직히 며칠 전에 롤러코스터 타듯 요동치는 감정 기복을 겪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남편이랑 8년 만났지만 결혼을 안했다면, 아이를 가질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좀더 행복했을까? 어떻게 달라졌을까? 솔직히 어떻게 살든 나는 겁나 잘 살지 않았을까?
지금 내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임신이 뭐라고, 체력은 20% 수준으로 바닥을 쳤고 무기력이 너무 심해서 출퇴근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매년 이맘때 제주도 여행을 가는데 이번에는 체력 때문에 정말 힘들었다. 고작 5분 올라가는 오름에 올랐을 뿐인데 다음날까지 두통과 허리통증에 시달렸다. 이래서는 숨 쉬는 것빼고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먹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마음 같지 않고 매일 책상 앞에 앉아 사부작대던 일상이며 점심시간마다 씩씩하게 걸어가 땀을 쭉 빼곤 했던 요가까지 일상 루틴이 모두 사라지니 그냥 밥만 축내는 버러지가 된 것 같았다.
이 와중에 life goes on 해야 하니 인테리어 미팅에 가구, 이사업체 알아보고... 태아보험 가입은 진짜 하나도 안 알아보고 그냥 옆자리 선배가 가입한 내역 그대로 받아서 이대로 해주세요, 했는데 그나마도 들여다보기 싫어서 최후의 순간까지 미뤄둔 상태다. 연휴가 끝나는 수요일에 주택담보대출 실행이며 태아보험 가입이며 이사업체 계약, 인테리어 미팅까지 또 다 해야 하는데 정.말.싫.다.
요즘은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낸다. 그냥 다 귀찮아... 가끔 옆에서 태교여행 언제 가냐 어디로 가냐 물어봤는데 솔직히 귀찮고 힘들어서 가고 싶지 않다. 여행을 가서 태교가 돼야 태교여행이지 가서 힘들기만 하면 그게 태교여행인가? 그러고 보면 일상에서도 전혀 태교를 하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냥 진심 궁금해진다. 다른 사람들은 임신기간 내내 행복하고 기대되고 설레고 막 그럴까? 나는 시간이 너무 안 가서 죽겠다가도 그냥 이대로 시간이 영영 멈췄으면 좋겠다. 내가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임신을 한 걸까? 분명히 내가 원해서 결정한 임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나이에, 상황에 떠밀린 걸까?
이제 집도 영끌해서 이사가야 하고 돈 없는 와중에 인테리어 가구 가전에 수억 박아야 하고 아기 태어나면 뭐 준비할 것도 많고 사야 할 것도 많고 신경쓸 것도 많고.........이 모든 게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스트레스다. 이 중에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사실 하.나.도.없.다.
나는 그냥 예전처럼 매일매일 투두리스트 지워가면서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면 뿌듯하고 운동하면 기분 좋고 맛있는 거 먹고 행복해하고 샴페인도 한 잔씩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은 것 같은데. 이 모든 게 실수였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뽀꼬 심장소리를 듣지 못한 걸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정말 어쩌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