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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이 Mar 04. 2024

Ep 1. 스페인 토마토는 겨울에도 맛있다.

   아시아나 레그룸 좌석을 구입한 건 신의 한 수였다.  장거리 비행 동안 다리도 못 펴고 앞사람 뒤통수만 보는 것은 20대에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마침 아시아나 공홈에 프로모션이 떠서 냉큼 레그룸 좌석을 구입했더니 다리도 뻗고 잔뜩 긴장한 배낭 여행객의 피로도 덜 수 있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음. 비빔밥인가? 고기 덮밥인가? 영화 <미비포유>를 보고 있는 것은 나의 눈동자뿐이고 내 맘과 정신은 온통 음식 냄새에 홀려 이성을 잃은 상태다. 식욕만 남아 있다. 잠시 후에 답답한 기내를 밝혀주는 환한 미소로 스튜어디스가 다가온다.


   쌈밥과 스파게티 준비되어 있습니다. 뭘로 드시겠어요?


    쌈밥이요! 망설일 필요 없다. 어쩌면 이번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먹는 제대로 된 한식일 수도 있으니 무조건 쌈밥이다.  1인용 기내식 쟁반이 칸칸이 들어가는 서빙 카트를 밀고 다니며 좁은 기내에서 미소를 잃지 않는 스튜어디스. 참을 인자를 하루에 몇 번이나 되뇔까. 덕분에 화면만 보며 버티는 긴 비행에 활력소가 된다. 식사를 준비하던 나의 모습은 어땠는지 자연스레 떠올려 보았다. 식사 준비를 하고 나면 힘들어서 밥 먹을 때는 제대로 대화를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쯤은 나도 방실방실 웃는 스튜어디스로 변신해 보면 어떨까. 그럼 민주적인 가사 분담의 그날이 가까워질까. 


    남은 거리를 확인하느라 몇 번이나 화면을 봤는지. 건조한 기내에서 화면을 보니 눈도 뻑뻑하다. 잠은 침대에서 자고 싶어 오전 비행기를 탔다. 낮시간이라 피로도는 낮았지만 도대체 잠이 안 오니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스페인 여행 책자는 이제 표지도 보기 싫을 정도로 봤다. 계획한 대로만 하면 된다. 더 이상의 정보 수집은 안 한다고 딱 결론 내렸음! 언제 다시 볼 지 모를 노을을 감상하고 다시 기내 태블릿의 온갖 영상을 눌러봤다. 더 이상 누르고 싶지 않을 때쯤 바르셀로나 엘프라트 공항에 도착했다.


     옆자리에 탔던 아저씨는 가족들과 바르셀로나와 파리를 여행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제주산 귤을 몇 개 드렸더니 내릴 때 선반에서 짐 내리는 것을 도와주셨다. 스페인 여행에서 만난 1호 천사님이셨다. 


    공항버스를 타고 에스파냐 광장에서 내려 호텔까지 캐리어를 끌고 갔다. 아테네아 칼라브리아 호텔. 아파트형 호텔이라 가끔 고기도 구워 먹고 과일도 편하게 씻고 요거트도 사서 쟁여둘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10분을 걸어가도 안 나왔다. 돌이 잔뜩 깔린 도로에 닿은 캐리어 바퀴가 어찌나 덜컹이는 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키가 큰 스페인 사람들은 닮은 꼴로 키가 큰 사냥개 느낌의 반려견들을 주로 데리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공원 근처를 지나면 반려견의 흔적이 사방에서 풍겨와 흠칫 놀라기도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가는 엄마를 보더니 딸아이가 구글맵을 켜고 호텔을 찾아간다. 여긴가 저긴가 헤매는 엄마와 달리 자신 있게 직진하는 딸을 보니 아주 든든했다.


   " 우리 딸 길을 잘 찾네. 멋지다. "

   " 엄마보다 내가 더 잘하지!"


    딸아 잘 커 줘서 고맙다.  하지만 비교는 안 했으면 좋겠구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 식은땀 잔뜩 흘린 엄마가 듣고 싶은 말도 아니다. 혹시 엄마가 너에게 비교하는 말을 한 적 있었니... 그랬다면 기억에서 지워버리렴. 엄마도 밀리에 쓰고 나서는 잊을게.  쿨럭.  


    9시가 넘은 시간에 가까스로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근처 과일 가게로 향했다. 신선한 토마토 5개와 오렌지 2개. 20유로, 환산해서 2600원이면 살 수 있었다. 한국에서 즐겨 먹던 제주산 귤처럼 스페인산 오렌지는 싱싱하고 달콤했다. 과일 좋아하는 모녀는 구름 위를 떠 가는 듯. 스페인 오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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