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사 바트요
까사 바트요 내부관람은 여행 막바지에 다녀왔다. 바르셀로나가 어느 청도 익숙해진 시기라 한결 여유가 있는 게 사진에서도 느껴진다.
온통 영어로 쓰여있는 예약바우처들을 모아서 가방에 넣으며 무사히 잘 다녀올 수 있을까 걱정도 했다. 이것저것 미리 챙겨둔 덕에 비교적 일정대로 잘 다녀올 수 있었다.
배낭여행 성공팁은 준비가 반이다. 열흘이 넘는 긴 기간 동안 다니는 여행이라 날짜별 시간대별로 예상일정을 계획하고 가능한 지키려고 애썼다. 개인 여행사 하나 차렸다 생각하고 동선 체크하고 인기 있는 기념품 목록도 정리해 뒀다. 낯선 곳에 간다면 가이드처럼 오늘의 일정 관련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머릿속에서 그려지도록 준비해 보자.
그럼 이제 까사 바트요 내부를 들여다보자. 가우디는 1904년부터 1907년까지 사업가 바트요씨의 집을 리모델링했다. 1877년에 지은 기존의 집을 개조한 뒤 다시 120년이 흐른 지금 까사 바트요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가우디는 다른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에서 가져온 곡선을 활용해 까사 바트요를 설계했다.
까사 바트요는 커다란 중정이 1층까지 이어져 있어 1층에도 햇빛이 비친다. 중정 내벽은 그라데이션 기법을 활용해 흰색에서 시작한 뒤 고층으로 갈수록 짙은 파란색으로 배열했다. 그래서 1층에서 올려다보면 넓은 느낌이 들고 위층에서 내려다보면 까마득한 심연을 보는 듯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막 리모델링을 마친 듯한 상태로 보존이 되는 게 놀라웠다.
오디오 가이드를 갖고 다니며 해당 전시물 번호를 눌러 설명을 들었다. 공사장 소음이 계속 크게 들려서 가 보았더니 관리직원이 바닥에 약품을 바르고 기계를 이용해 흡수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두 명은 불평할 법도 한데 다들 관리작업을 잠시 보다가 다시 오디오 가이드에 집중하는 식이었다. 흔한 소음이라는 뜻이겠지. 그만큼 관리를 철저히 하니 이렇게 원형 그대로 잘 보존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날이 화창해서 그라시아 거리에서 비치는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색색의 창문들이 예쁘게 반짝였다. 화창한 날 다시 오자고 돌아설 수 없는 배낭여행객인데 이렇게 최적의 날씨를 만나게 되어 감사했다. 까사 바트요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라시아 거리를 내다보며 100년 전 이곳에 살았던 바트요씨는 어떤 풍경을 봤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19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바르셀로나는 인구밀도가 파리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지중해 상업의 중심지였다. 급속한 인구 팽창에 도시 계획을 정비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담당자가 세르다였다.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가우디가 세르다의 도시에 점을 몇 군데 찍었을 뿐이라는 말이 있다. 세르다는 바르셀로나 도시 계획에 큰 역할을 담당하면서 만싸나와 에이샴플라로 부르는 개념을 도입한다. 도시 건축물의 기본 단위 블럭인 만싸나가 모여서 에이샴플라를 이룬다. 만싸나를 따라 직선도로를 건설하고 디아고날이라는 대각선 도로도 만들었다. 디아고날 덕분에 교통 흐름이 빨라졌고 구도심과도 연결되었다. 건물 층수를 제한하고 인도도 차도의 3배 넓이로 만들어 사람들이 살기 편한 도시로 가꾼 결과 지금의 계획적이고 정돈된 건축도시 바르셀로나가 되었다.
요즘 유현준 교수님이 건축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로 풀어서 방송에서 설명해 주시고 관련 책도 쓰시고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신다. 어느 유튜브 영상에서 가우디는 광장처럼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공간을 건축하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까사 바트요 루프탑 카페에 가니 바르셀로나 거리를 내려다보는 전망을 즐길 수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인증샷을 찍느라 좀처럼 사진을 찍을 기회를 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가우디는 생존 당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장소를 짓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의 건축물을 보러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가우디는 사후에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가난한 건축가가 후원을 받지 못하는 건물을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루프탑 카페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십자가를 발견한다. 그 옆으로 용의 척추를 본뜬 구조물이 있다. 이것은 카탈루냐의 수호성인 조르디를 표현한 것이다. 옛날 사나운 용이 살고 있어서 날마다 처녀를 바쳐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새 공주의 차례가 되어 왕은 용을 물리칠 수 있는 기사를 찾는다. 그 기사에게 공주와 결혼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용감한 기사 조르디가 나서서 용의 몸에 칼을 찔렀다. 그러자 용의 피가 땅에 스며들었고 빨간 장미가 피어났다. 조르디는 장미를 공주에게 선물로 줬고 둘은 결혼했다. 그 이후 조르디는 카탈루냐 지역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지금이야 외교능력, 군사력, 경제력 등 여러 가지를 갖추어야 안전한 나라가 된다는 믿음이 굳건하지만 예전에는 전투를 잘하는 기사가 필요했고 기사들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 결과 가우디도 건축물 이곳저곳에 용을 새겨두어 사람들은 수호성인 조르디를 떠올리게 된다.
까사 바트요에 갈 기회가 있다면 내부 관람을 추천드린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이와 함께 스페인앓이를 하고 있는데 그중 상당 부분은 가우디 건축과 관련된 것이다. 가우디가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린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