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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뭇별중한별 Jan 15. 2022

아내와의 산책

아내는 산책을 좋아한다. 특별히 볼만한 경치가 있거나 하지 않아도 여기저기를 발로 누비며 둘러보고 함께 이야기 나누다가 흥미가 생기는 곳에서 잠깐 쉬어가는 것을 즐긴다. 우리의 연애시절 추억이 대부분 동네 산책일 정도로 그녀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데서 행복을 느낀다.

처음 그녀와 함께 걸을 때는 우리 둘의 키 차이만큼 다른 보폭 때문에 서로가 불편했다. 처음에는 키가 큰 데다 성큼성큼 걷는 버릇이 있던 나에게 발을 맞추기 위해 그녀는 종종거리며 뛰어야만 했고, 그 후엔 내 보폭이 줄어들고 그녀의 걸음은 빨라져 함께 걷는 것이 편안해졌다. 산책의 자세에도 변화가 생겼다. 내 걸음이 빠르던 때에는 그녀가 나에게 팔짱을 끼고 끌려오다시피 했지만 둘의 걸음이 맞춰진 후에는 손을 맞잡고, 날이 추워지면 맞잡은 손을 내 외투 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그녀의 집에는 데이트 통금시간이 있었으므로 특히 좋아한다는 밤 산책을 나와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그래서 나는 그녀의 집 근처로 자취방을 옮겼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마실 가는 편한 차림으로 몰래 접선하듯 만나서 동네 골목골목을 오래도록 누비고 다녔다. 그녀가 사랑하던 그 동네의 이곳저곳을 나에게 소개해주기도 하고, 골목골목마다 스며든 어릴 때 추억 이야기도 하고, 벚꽃나무가 흐드러지던 어느 집의 담벼락 앞에서는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서로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산책의 끝을 항상 장식하던 포장마차 우동과 순대볶음. 둘 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어서 이것저것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마음까지 가난하지 않도록 해주었던 우리 서로의 존재처럼, 속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해 주던 그 우동 국물을 우리는 매우 사랑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난 뒤, 우리의 산책은 멈췄었다. 신혼살림을 낯선 타지에서 시작해서 주위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양가 어머니들은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내 아내는 쌍둥이 딸들을 혼자서 낳고 길렀다. 지금도 TV에서 독박 육아라고 한탄하는 사연이 나올 때마다 코웃음을 칠 정도로 아내의 육아는 그 자체만으로도 전쟁이었다.

그런데 애들은 또 얼마나 울어대는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지금도 툭하면 울어댈 정도로 우리 아이들은 울음이 많은데 정말 아기 때는 이러다 발작하는 건 아닐까 할 정도로 심하게 울어댔었다. 한 명에게 젖을 물리면 자기도 먹겠다고 울고, 다 먹이고 나면 서로 안아달라고 칭얼대고, 아내의 작은 몸으로 둘 모두를 한꺼번에 몇 시간 동안 업고 안아서 간신히 재워도 한 명이 훌쩍이면 금방 둘이서 울음 합창을 해대고….

나 혼자 외벌이어서 살림이 빠듯해지기도 했지만 낯선 이의 손을 타는걸 지독히 싫어하던 아이들 때문에 돌보미 이모조차 고용하지 못한 그야말로 전쟁 같은 독박 육아였고, 아내는 그 전쟁을 홀로 치르는 전쟁영웅이었다.

그 무렵 아내는 원래라면 밤 산책을 즐겼을 시간에 베란다에 홀로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흐느꼈더랬다. 술은 입에 대지도 못하는 친구인데….


아이들이 자란 지금 우리 넷의 산책길엔 둘씩 짝을 짓는다. 엄마에게 하나 붙고, 아빠에게 하나 붙고. 너희 둘끼리 다녀주면 안 되겠느냐 부탁을 해봐도 금세 다시 엄마 아빠에게 달라붙어 아내와 나 사이를 쪼개 놓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소원 중 하나는 혼자서 엄마와 아빠 손을 다 함께 잡고 셋이 다니는 것이다. 그것을 딸들은 “외동딸 놀이”라고 부르는데 아주 가끔 그런 기회가 있으면 정말 입이 찢어져라 좋아하는 걸 보면 부모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쌍둥이로서의 열망과 나름대로의 애환이 있구나 싶어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아무튼 아내와 나는 떨어져 걷는데 익숙해져서인지 이제 다시 서로의 보폭은 달라지고 거리도 멀어졌다. 옛날에 보폭이 다르던 때는 아내가 팔짱을 껴서 매달려오기라도 했다지만 지금은 내가 한참을 앞서가면 저 뒤에서 따라온다. 한 아이의 손을 잡고 한참 걷다가 멈춰 서서 어디쯤 따라오나 두리번거리고, 한참을 기다려서 다시 만나고 할 때가 많아지더니 이젠 아예 쇼핑몰 같은데서는 서로 볼 일 보다가 전화로 어디냐고 물어서 다시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가 그랬는데…. 저만치 혼자 걸어가서 횡단보도 건너가 버리고, 지하철 타고 먼저 가버리고.

그땐 왜 저러시나 이해를 못 했는데.






이제 조금 있으면 아이들도 사춘기에 접어들 테고 그럼 지금같은 부모 껌딱지는 아닐텐데"

아내는 벌써부터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생일을 맞아 오랜만에 둘 만의 데이트를 나와서도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아내다. 그래. 새가 둥지를 떠나듯이 아이들은 자기 인생의 비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때 남겨진 우리 사이 거리가 지금 떨어져 걷는 거리만큼이라면?


내가 멈춰 서서 아내를 기다릴 수 있을까? 아내는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부지런히 날 쫓아오기는 할까?


이제 벌써 결혼 12년 차. 그녀와 함께 걷는 것이 아직도 행복하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사랑이니 정이니 하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내 옆에 있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고,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슬퍼진다는 것이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자리 잡은 크기인 것 같다. 그녀가 그동안  내 마음속 자기 영역을 넓게 잘 지켜준 것 같아 고맙다. 그리고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으니 계속 걸어야지.


다시 그녀와 보폭을 맞추고, 다시 그녀의 손을 맞잡고.

함께.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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