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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NDWANA Aug 21. 2019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평등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메베스



한국의 자칭 보수들은 자유는 좋아해도 평등에는 알레르기 반응이 있다. 그들이 좋아하는 '자유'도 개인의 존엄과 자아실현을 위한 인간본연의 권리라는 본질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다른 체제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며 너무도 이데올로기적인 색채를 가진 것이다. 자유를 이렇게 이데올로기로 구속한 마당에 평등이라는, 어쩌면 단어 자체에서부터 이데올로기적인 냄새가 풍기는 것을 어떻게 해야할지 좀 난감했던거 같다. 하지만 서구의 발전된 민주주의국가에서는 평등을 자유와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거니와 이것을 무시해버리기도 어렵다. 그래서 나온게 '기회의 평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회라는 것 자체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은 교육과 생활이 계층화되어가고 있다는 데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독일은 나름대로 복지가 체계화된 국가이다. 얼마전에는 평생동안 직업을 한번도 가지지 않은 어떤 독일남자가 화제가 된적이 있었다. 실업수당만으로 나름 검소하게 살아가던 그 남자는 "직업을 왜 가지려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발언으로 독일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비난이 높아지자 그 남자는 할 수 없이 식당의 웨이터로 취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정도 수준의 복지국가에서는 복지시스템에 기생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전 국민을 위한 복지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는 격이다. 



메베스가 이야기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물론 위험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몰개성을 의미하고 어떤 전체주의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뉴라이트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자들의 복지에 대한 반대 논리가 되는 것은 참으로 뻔뻔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평등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정의'에 대해서는 생각하려 하지 않고 평등자체를 위험한 것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정의란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불가피하게 불평등을 발생하게 하는 과정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합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계적인 평등은 있을수도 없는 것이고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기계적인 평등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지만 정의로운 평등을 향한 시도는 많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격어가면서 정의에 한발자국씩 다가서려는 노력의 총체이고 그 민주주의가 떠받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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