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으로 화한 이용후생사상

[열하일기] 박지원

by GONDW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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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가 사회계약설을 주장한게 1762년,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한게 1769년, 괴테의 불후의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게 1774년, 미국이 독립선언을 한게 1776년이다.


1780년에 박지원은 그의 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잔치에 축하사절단으로 가게 된다. 열하는 건륭황제의 별궁이 있던곳으로 지금의 하북성의 청더이다. 건륭제는 이곳에서 피서를 즐기면서 몽고의 움직임을 예의 관찰했는데 이곳에서 칠순연이 벌어졌던것이다.


박지원은 여행중에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보며 왜 조선이 헐벗고 못사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세계적으로 산업혁명을 앞두고 있었던 시기이지만 조선에는 변변한 도로조차 없어서 수레조차 다니질 못했다. 그러니 바닷가에서는 썩어나는 해산물이 조금만 내륙으로 가면 금싸라기가 되는것이고, 남쪽에는 지천으로 나는 여름과일이 북쪽에서는 듣도보도 못한것이 되고, 한쪽에 물난리가 나면 그해에 풍년이 들어도 굶어죽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각 지방의 특산물이 다 사람사는데 소용이 닿는 것인데 이들이 서로 교통하지 못하니 궁핍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로마가 기원전 500년 경부터 주력했던것은 다름아닌 도로를 닦는 일이었다. 이탈리아반도는 한반도의 형세와 흡사하다. 북쪽지방은 험준한 산악지형이고 남쪽은 평야지대이다. 똑같은 자연적인 조건에서 한쪽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만들어낼만큼 도로건설에 열성이었고 한쪽은 산업혁명의 벽두에서 수레하나 다닐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같은 차이는 국부의 차이로 이어졌고 한쪽은 제국을 건설하고 한쪽은 언제까지나 강대국의 속국 신세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그동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가 쇄국정책으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서양을 일찍 접촉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과학기술에 있어 뒤쳐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게 되다보니 제국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나라를 잃는 약소국의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흥선대원군에겐 좀 억울한 평가일듯 싶다. 당시 조선의 지배계층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고방식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설사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잘 알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했던 왕이 있었다 할지라도 당시 소중화사상에 빠져있던 조선의 식자층을 설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선진문물에 목말라하던 일본이 스펀지처럼 서양의 문물을 빨아들이고 국제적인 무역의 주요 활동국이었던 청나라에도 서양의 문물이 스며들때 그 사이에 갇혀있는 조선은 이미 200년도 전에 망해버린 명나라의 유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양의 기술연구라는 것은 공맹을 논하는 자가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고 족보를 따지는 신분제는 과학기술의 취지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양반들의 허세는 세계정세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게 만들었고 세도정치로 일컽어지는 내부적인 문제와 더불어 급변하는 세계의 흐름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오랑캐의 나라에서 오랑캐를 업신여기는 소중화사상은 조선의 지식인들을 구제불능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구한말에 신사유람단이니 영선사니 국외로의 견학과 기술습득을 위한 국가적 사업이 있긴 했지만 실제 기술습득은 중인들이나 그 이하계층에 어울리는 것이었고 양반들은 아예 관심자체를 두지 않으려했다.


심지어 일본이나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학위를 받은 신지식인들 마저도 국내에 들어와서는 권력과 가까운 언론이나, 벼슬아치 노릇을 하려했지 자신들의 배운 지식을 산업이나 연구를 통해 접목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가사상의 폐단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공계가 홀대 받는 이유는 사회적 권력이 정부, 언론, 국가기관 같은 비산업적 기관에 집중된 탓이다.


명나라가 망한지 4백년이 되고 조선이 망한지도 1백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나라에는 반상차별이 존재하고 주자의 망령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실학사상에 대해 국사교과서에서 엄청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찻잔속의 소용돌이일 뿐이었다. 주자가 신이 되어있는 나라에서 실학을 연구하는 지식인은 미운털이 박혀 당쟁의 틈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변방으로 물러나거나 귀양을 가게 되는게 보통이었던 것이다.


이런 한계로 인해 박지원의 이용후생사상은 열하일기라는 문학작품으로 화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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