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부탁해

[외딴방] 신경숙

by GONDWANA



1.


1988년... 나는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하교길에 버스에서 내려 거제리시장 골목을 걷다가 복제팝송테이프를 파는 리어카를 기웃거린다. 갑자기 리어카 옆의 커다란 철문이 열리고 교복을 입은 산업체여고생들이 어둠속을 걸어나와 기숙사로 올라간다. 여느 여고생들처럼 삼삼오오 짝을 지은 그들은 쉴새없이 재잘거리고 있었고 나는 등뒤로 사슴의 무리가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상기된채 리어카에 꼿힌 테이프들을 의미없이 만지작거린다. 런던보이스의 'Harlem Desire'가 흐르는 가운데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여고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솔직히 그때까지도 나는 이런곳에도 학교가 있었나? 라고 잠시 놀랐을뿐 산업체여학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를때였다. 얼마쯤 뒤에 친구들이 그 여학생들을 가리켜 '공순이'라고 킬킬거릴때 난 조금 충격을 받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를 하다니... 그리고 그 여학생에게 무엇인가 빚을 진듯한 기분이 들면서 마음한구석이 짜안해지는 것이었다.



2.


태희가 돈 봉투를 내민다. 지영은 금방 갚겠다고 이야기한다.
태희와 헤어진 지영은 핸드폰 대리점으로 들어가서 태희에게서 빌린 돈으로 핸드폰을 산다.
집으로 돌아 온 지영은 새로 산 핸드폰을 들여다 본다. 지붕에서 흙더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3.


창문밖으로 턱을 괴고 기찻길을 보면 유난히 그 길을 따라 가고싶은 시절이 있다. 유년기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꿈에 부푼 시기이다. 하지만 이때는 번데기를 찟는 나비같이 아슬아슬하다.
달빛같은 얼굴을 가진 산업체학교의 여학생들의 꿈은 거창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이 사회에서 정당하게 살아가겠다는 대체로 소박한 것이다. 하지만 부조리한 사회에서 그녀들이 첫번째로 사회를 향해 띄운 싹은 맹렬한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낀다.
하지만 그들은 거친 바다에 나뭇잎을 띄워야만 한다. 나뭇잎은 아스라히 보이는 목표를 향하여 조심스럽게 전진하기 시작한다.
나중에 돌아보면 미숙한 점이 너무도 많을 것이다. 어떤 부분은 기억에서 아예 지워버리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돌아간다면 이때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나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할때이고 주변에 대하여 가장 열심히 살필때이고, 옆자리에 있는 사람의 손을 가장 세게 꽉 잡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유학준비를 하던 한 명문대 여학생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그녀는 우연히 주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옷을 산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죽음은 안타깝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충분히 추리할 수 있지만 지갑을 보고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것은 그 나이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녀를 조금만 따뜻이 안아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석양의 마초이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