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죽음] 아서 밀러
영화 '글렌게리글렌로스'를 보면 세일즈를 위해 온갖 허세와 음모와 속임수가 난무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악인은 아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딸의 병원비를 걱정해야하는 평범한 서민의 모습이다. 택시를 고속도로에서 180Km로 달리게 하는 건 택시기사가 성질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납금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글렌게리글렌로스에 나오는 부동산 세일즈맨들은 고객뿐아니라 서로을 속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했을때 평생동안 떠들게 될 대단한 무용담이 된다. 비단 세일즈맨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의 숙명이 그렇다. 윗사람들의 눈에 들기위해 먹고살기위해 매일매일을 줄타기 하듯 살아나간다.
'글렌게리글렌로스'의 원작은 연극이었다. 그리고 글렌게리글렌로스가 무대에 올려지기 한참 전에 이미 세일즈맨을 소재로 한 연극이 브로드웨이를 강타했고 그 연극은 지금도 전 세계 어딘가에서 상영중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글렌게리글렌로스가 퓰리처상을 받기 수십년 앞서 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도 역시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샘플을 보여주고 갖은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영업을 하는 세일즈맨이 주인공이다. 그는 그나마 화려했던 과거를 가졌으나 이제 나이가 들어 내근직으로 옮기길 희망한다. 아이들은 장성했으나 특별한 직업을 가지진 못하고 있다. 당장 생활비가 없는 어려운 살림이지만 그들의 이상은 높다. 아버지는 아들이 적진을 뚫고 터치다운을 해내는 것처럼 반드시 성공할 것을 믿어의심치 않지만 아들은 좀도둑에 일당노동자 신세이다. 회사에서도 해고된 세일즈맨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하고 만다.
1940-50년대 미국 중산층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겹친다. 아니 현대인들이 자본주의에 휘둘려 사는한 어느때이건 가부장적 중산층은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아버지는 가정내에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며 자신의 과거를 포장하고 자식들에게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그말을 믿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실망시켜서는 안된다. 머리가 커지고 아버지의 허세가 눈에 보일때쯤에는 자식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것이 무언지도 모르는채 이미 경쟁에서 탈락해버린 자신을 원망함과 동시에 부모에게 반항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세상의 톱니바퀴에 끼어버린 중산층은 자신이 못다이룬 꿈을 아이들에게 전가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조그만 재능도 과대포장된다. '저 녀석은 천재가 틀림없어!', '넌 반드시 서울대에 가야 돼' 이런 말에 아이들 역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그리고 그 최면에서 깨어나서 자신의 위치가 애당초 바랬던 곳에서 한참 떨어져있다는 것을 인지할때 가정내의 갈등은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평범해져버린 천재들은 소싯적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을때의 향수를 다시 재생산해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다시 짐을 지울 것이다. 그리고 주위를 향해 '글렌게리 글렌로스'의 잭 레먼의 대사를 외칠 것이다
'당신이 세일즈를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