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탈식민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란츠 파농

by GONDWANA



부유하고 윤택한 서유럽의 부의 상당수가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식민지가 기반이 되었다. 아프리카는 문명화되기도 전에 식민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현재까지 그 그늘에 신음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여전히 열강의 자본에 종속되어 있으며 내부의 분열로 혼란스럽다. 수억명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으며 치안부재상태에 있는 곳이 허다하다.


1960년대초에 많은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하게 되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 열강의 괴뢰정권이 들어섰고 투자라는 미명하에 자본의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다. 국제은행들이 선심쓰듯 빌려준 채무가 아프리카의 간접자본에 투자되기 보다는 공무원들의 사적인 배를 불리거나 끝도 없는 내전의 전쟁자금으로 쓰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조금이라도 양심이 남아있다면 이같은 아프리카의 비극이 아프리카 민족들의 책임이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식민상황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의 삶은 자기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노력해도 이주민처럼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계급적 좌절을 격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이주민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 한가지이다. 이주민처럼 자신의 농토를 가지고 깨끗한 집에서 깨끗한 음식을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쉬고 싶을 때는 쉬는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삶은 도처에 널린 폭력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며 굴종을 강요받는 것이다.


열강들이 행하는 식민지교육에 원주민들은 세뇌된다. 인종주의가 바탕이 된 자본의 침투는 원주민들이 전승해 왔던 전통과 문화를 하루아침에 미신이나 하찮은 것으로 곤두박질 시킨다. 원주민들은 자본주의가 장악한 경제체제 내에서 물질에 경도된다. 더 이상 이웃간의 나눔도 없고 사냥이나 경작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돈 없이도 수천년을 풍족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모두 돈벌이에 나서게 되지만 비참한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농토와 공동체를 잃은 원주민들은 도시에 몰려들지만 착취당하는 공장노동자로써의 비참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체베가 이야기한 '모든것이 산산히 부서지는' 상황에서 원주민들의 미래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탈식민화를 꿈꾼다. 존재의 탈식민화는 아프리카의 원주민이 이주민처럼 윤택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것이고 고도자본주의하의 중심도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대인이 인간본연의 자유와 가치를 깨닫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강요된 이데올로기와 강요된 교육으로 길러진다.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을 지향해야하며 자본의 논리에 굴종해야한다. 새삼스럽지만 우리 대부분은 자본에 의한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멋진 집에서 폼나게 놀면서도 먹고사는데 지장없는 것이라면 우리의 처지는 아프리카의 식민지배를 받는 원주민과 다를바가 없다. 모두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인것이다. 그 위에는 제국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소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지배자가 군림하고 있다. 존재의 탈식민화는 이 지배자에 대한 독립투쟁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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