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과 마르가리타] 불가코프
왜 하필 본디오빌라도일까? 내가 책을 읽으면서 가진 궁금증 중에 제일 큰 것이었다. 시인, 거장, 마르가리타, 볼란드가 등장하는 주플롯보다 액자소설로 등장하는 예수가 처형되는 순간의 예루살렘과 흑마술이 판을 치는 모스크바 사이의 관계에 과도하게 집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설 뒷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만 그 액자소설의 주인공은 예수가 아닌 본디오빌라도였다.
액자소설은 원래소설의 주제를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왜 불가코프가 본디오빌라도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는지가 이 소설의 핵심주제가 될것임에 틀림없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는 한 문장 때문에 본디오빌라도는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기독교도들의 공적이 되었다. 예수의 사형을 결정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고 시리아총독이었던 본디오빌라도는 거기에 대해 어떠한 결정권도 없었고 유대인들과의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막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 의미로 예수에게 사형을 승인한 본디오빌라도는 자신은 이 결정과는 상관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손을 씻기까지한다.
액자소설속의 본디오빌라도는 예수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되돌리지 못한데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이런 본디오빌라도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함으로써 그를 재조명하고 구원한다. 하지만 본디오빌라도는 여전히 매주일이면 기독교도들의 입에서 예수를 죽인 악당으로 묘사된다. 그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거장의 문학내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문학은 가정법을 이용하여 이처럼 많은 것들을 구원할 수 있다. 역사의 개연성을 이용한 문학작품으로 되살아난 역사적 캐릭터들은 부지기수이다.
본디오빌라도에 대한 액자소설을 쓴 사람은 소설속의 거장이다. 물론 이 거장은 불가코프 자신을 투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가코프는 이 소설로써 무엇을 구원하고 싶었을까? 그것은 바로 문학 그 자체였던것 같다. 무시무시했던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러시아 사회를 숨막히는 것으로 만들었다. 무자비한 검열로 체제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문학과 작가의 역할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지만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함으로써 문학은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선언을 한 셈이다.
소설의 내용은 판타지가 현실과 교차하는 매우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이다. 그동안 러시아의 대문호들이 즐겨썼던 사실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러시아소설로써는 매우 특이한 위치에 있는 소설인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핍박받는 문학과 부조리한 사회상을 고발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