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마톨로지] 데리다
그라마톨로지, 즉 문자학에 대한 데리다의 대표작이다. 문자와 언어에 대한 데리다의 사려깊은 독서로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루소의 '에크리튀르'에 대한 입장을 소개하고 비교한다. 데리다는 문자란 언어활동에 부수적으로 따라붙는 것이라는 이들의 주장을 논파한다. 언어와 텍스트의 상호작용에서 서로 오해와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나 텍스트를 해석한 텍스트에서는 그 언어나 텍스트의 본래 의미와 사뭇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텍스트 변환과정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했을때의 정념을 그 말을 텍스트로 옮긴것을 읽는 사람이 완전하게 느낄 수는 없다. 그래서 데리다가 만들어낸 단어가 '차연'이란 말이다. 언어와 문자는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이런 차연의 관계있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데리다가 단순하게 이런 언어-문자의 상호작용을 밝히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이라면 이 책은 데리다를 대표하는 저작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데리다가 진짜로 노린것은 로고스 중심의 서양철학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에 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동안 말과 이성이 중심이 되는 것만 철학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외의 것은 철학이 아니었으며 이단이며 광기로 해석되었다. 형이상학적 단어들은 명징한 이성하에서 자로 잰듯 명확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많은 철학자들이 착각하거나 억지로 믿어왔다. 데리다는 그런 위선을 거부한다. 심지어 형이하학적인 언어나 단어 조차도 개인들 각각에게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 서양철학자들이 쌓아올린 이성의 바벨탑은 그 실체가 모호한 것이며 서로간에 촘촘하게 연결되어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개념사이의 좌표는 유동적인 것이 되버렸다.
이런식으로 서양사상은 완전히 해체된다. 데리다에게 해체주의자라는 훈장은 이렇게 주어졌다. 현대의 부조리와 비극은 이성중심의 세계관이 낳은 산물이라는 데도 반박할 말이 없다. 그래서 어떤 대안을 마련해야하지 않냐고 누군가 애가 탈지도 모르겠지만 데리다가 취한 방식은 인간 문명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언어와 문자를 사상적 도구로의 역할에 있어서 무용지물로 만든것이었으므로 이젠 언어와 문자로는 어떠한 집도 지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고 말았다. 짓는다 하더라도 해체주의 앞에서 흐물흐물해지는 그 집은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루소와 뼛속까지 루소주의자임을 자처한 레비스트로스에 대해 그나마 데리다가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은 데리다의 주장 역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